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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루 파인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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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블로그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블로그는 특별한 테마 없이 제가 아무 거나 생각나는대로 글을 쓰는 용도의 블로그이므로 전반적으로 내용물은 잡다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포스팅들이 있습니다. (클릭하면 해당 카테고리로 이동합니다) 음악 : 음악 관련 내용입니다. (거의 클래식 이야기밖에 안나옵니다) 도서 : 도서 관련 내용입니다. 주로 읽은 책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씁니다. O Castitatis Lilium : 백합(장르) 관련 내용입니다. Kunstidiot : 문화상품(중에서 주로 애니/만화/게임)에 관한 내용입니다. Military : 밀리터리 관련 내용입니다. 보고 들은 것 : 제가 직접 보거나 들은 것에 관해 쓰는 곳입니다. WebLog : 제가 인터넷에서 보거나 읽은 것에 관해 쓰는 곳입니다. 뉴스와 현안 : 이런 저런 뉴스나 최근 이슈에 관한 생각을 쓰는 곳입니다. 농담 : 농담삼아 쓴 글들입니다. 잡상노트 : 그냥 이런 저런 잡생각과 뻘짓의 기록입니다. (아직 졸업못한 중2병 따위가 발산되기도 합니다) under 1권 -이계 노스탤지어- 상태 : ☆☆☆☆ 스페로 스페라 상권 상태 : ☆☆☆☆☆ 부엉이와 밤의 왕 상태 : ☆☆☆☆ 레이디 X 버틀러 1권 상태 : ☆☆☆☆☆(신품; 비닐 벗기지 않음) 미운 오리의 사랑 1권 상태 : ☆☆☆☆ 트레스패서 1권 상태 : ☆☆☆☆☆ OL누님과 트러블 노트 1권 상태 : ☆☆☆☆ 백은용왕의 크레이들 1권 상태 : ☆☆☆☆☆ 검의 여왕과 낙인의 아이 1권 상태 : ☆☆☆☆☆ 링 1권 상태 : ☆☆☆☆☆ 가격 : 권당 1,500원 배송료 : 권수 무관 3,000원 구매방법 : 비공개 덧글로 연락처 및 배송정보(수령주소, 연락처 및 수령인)을 확인해주시면 입금정보를 송부드리고 입금 확인후 발송합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이것은 단순히 무력이 권력실현의 도구라는 그런 의미뿐만은 아니다. 국가의 주요 기능 중 하나 - 특히 과거로 갈수록 중요시되는 기능 - 는 무력의 독점이며,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런 독점은 봉건제와 같은 느슨한 형태로부터 중앙집권제와 상비군이라는 더 엄격한 형태로 발전한 것이 일반적이었다. 국가의 가장 원초적인 목적은 개인 및 씨족들의 집단적 안전보장이며, 내외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국가는 무력을 독점해야 한다. 그리고 무력은 가장 원초적인 권력으로서, 국가가 국가로 존재하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권력수단의 배후에도 역시 무력이 존재한다. 즉, 무력의 독점은 국가의 존재수단이자 존재목적이다. 물론 폭력은 인간의 근본적 속성 중 하나이므로 (인간으로부터 주먹을 뺏을 수 없듯이) 무력의 독점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의미이며, 국가마다 그 정도는 조금씩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미국은 시민의 총기 보유를 비교적 광범위하게 허용하고 있으나 다른 대부분의 서구 국가에서는 훨씬 엄격하다. 그러나 아무리 시민의 무장력을 폭넓게 허용하는 현대국가라도, 그 무장력은 근본적으로 국가가 독점한 무장력과 비교하면 한없이 미미한 수준에 불과하다. 특히 질적인 수준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국가는 무력을 독점했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즉, 시민의 무장력으로 현대국가를 전복하는 것은 그 국가가 아무리 압제적이고 견딜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시민의 무장력이 정권을 거꾸러뜨릴 가능성은 압제자의 가혹함보다는 오히려 권력기구의 허술함에 더 비례하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시민혁명의 정당성을 약간 훼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역시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현대국가에서 시민과 국가의 무장력의 격차가 극단적으로 크게 벌어지면서 이런 측면이 더욱 강조된다. 그 결과, 시민이 압제정권에 저항할 때 독재정권은 외부로부터의 간섭에 의해 무너지거나(리비아), 기 존재한 내부 무력집단이 이를 진압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무너지거나(튀니지), 심지어 이런 무력집단이 정권과 권력투쟁을 벌인 결과 무너지거나(이집트) 했다. 오히려 "외환 또는 내란"을 동반하지 않고 시민의 힘만으로 압제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은 힘들다는 것이 다시 증명되었다. 예컨대 아랍 세계가 혁명에 불타오를 때도 몇몇 독재정권들은 다른 독재정권들보다 더 사악한 압제를 자행하면서도 건재했다. 시리아는 국제연합 따위 좃까라는 패왕색 패기를 보이며 선전하고 있고, 북한같은 진정한 압제자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사실 독재자가 스스로 굳게 마음먹기만 한다면 일군의 시민들을 "청소"하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시리아는 도시 하나를 포위공격해서 저항군 몇만명을 학살한 적도 있는데, 이건 현 시리아 대통령의 아비 때의 일이다. 그리고 광주 또한 그러한 사례이다. 전통적으로 저항권은 시민들이 압제자에 대항해서 직접적인 무력으로 그를 끌어내리는 것을 포함했다. 그러나 무력의 독점을 완료한 현대국가에 있어서 시민이 저항권을 가진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저항권이 어떤 형태로 존재해야 하는지, 나아가 저항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쨋든 현대국가에서 시민의 저항권이 어떤 형태를 취하든, 그것은 길거리를 바리케이트로 봉쇄하던 낭만적인 19세기 프랑스 시절의 저항권에 대한 인식과는 현저하게 달라져야 함이 분명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 "철학과 굴뚝청소부" 초판, 도서출판 새길(1994), p.144 (변영우 그림) 를 살짝 수정 경전과 교리에서 뭐라고 말하건 간에, 현대 한국 기독교 내외의 일반인들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사후세계관에 대해 널리 퍼져있는 이미지는 대략 이런 것이다.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가서 심판을 받는다. 여기서, 생전의 믿음 또는 행적을 기준으로 '합격'된 사람은 (즉각적 혹은 약간 지연된 후) 천국에 영원히 살게 되고, '불합격'된 사람은 지옥에 떨어져 영원히 고통을 받게 된다. 편의상 이를 "현대 기독교적 사후관"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이런 식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점은 실제 기독교(그리고 그 조상인 유대교)와 잘 맞지 않는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불필요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이 "현대 기독교적 사후관"은 실은 현대적이지도 않고 기독교적이지도 않으며, 이 이름은 순전히 편의상 임의로 붙여둔 것이라는 점을 확실히 해 둔다. 이하 이 용어에는 항상 "따옴표"를 붙일 것이다. 먼저 유대교로부터 기독교까지 이어오는 금과옥조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에 관해 성경이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출애굽 20장 여기서 구약(특히 모세오경)시대의 전형적인 생사관이 나타난다. 즉 사후세계, 특히 현세에서 하느님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들에게 보상한다는 개념으로써의 사후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세를 (종교적 계명의 관점에서) 성실히 잘 살아간 데 대한 인센티브는 사후세계가 아니라 후손에 대한 음덕으로 주어진다. 이러한 생사관은 현대 기독교도들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동양의 (유교에 전반적으로 흡수된) 전통적 사후관에 더 가깝다. 이런 식의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은 사무엘기에 있다. 그리하여 사울은 신하들에게 "혼백을 불러내는 무당을 찾아보아라. 내가 가서 물어봐야 하겠다." 하고 영을 내렸다. 신하들이 "엔도르에 혼백을 불러내는 무당이 있습니다." 하고 아뢰자 사울은 남이 알아보지 못하게 옷을 갈아 입고는 두 신하를 데리고 밤에 그 여자를 찾아가서 "내가 말하는 혼백을 불러내어 내 운수를 보아다오." 하고 청하였다. 그 여자가 사울에게 "당신은 혼백을 불러내는 무당과 박수가 이 땅에서 왕명으로 근절된 것을 모르십니까? 그런데 생사람을 잡으려고 이 목에 올가미를 씌우시는 겁니까?" 하고 대답하자 사울은 야훼 앞에서 맹세하였다. "내가 살아 계신 야훼 앞에서 맹세한다. 이 일로 자네에게 죄가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그러자 여인이 물었다. "누구를 불러드릴까요?" 그가 대답하였다. "사무엘을 불러다오." 그 여자는 사무엘이 나타난 것을 보고 놀라 소리치며 사울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저를 속이셨습니까? 당신은 사울 임금님이 아니십니까?" 왕이 말하였다. "두려워 마라. 무엇이 보이는지 말만 하여라." 그 여자는 "지하에서 유령이 올라오는 것이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사울이 다시 그 여자에게 "어떤 모습이냐?" 하고 묻자 "도포를 입은 노인이 올라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에 사울은 그가 사무엘인 줄 알고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하였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나를 불러내어 성가시게 구느냐?" 사울이 대답하였다. "매우 어려운 일이 생겼습니다. 불레셋 군이 저를 치려고 진을 쳤는데, 하느님께서는 저를 떠나셨는지 예언자로도, 꿈으로도 저의 물음에 대답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 말씀을 듣고자 선생을 모신 것입니다." 사무엘 상권 28장 죽은 사람을 네크로맨서의 주술로 불러낸다! 이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무엘, 그러니까 이스라엘 왕조를 세운 하느님의 예언자다. 현대 기독교적 생사관 하에서 이런 사람은 아마 천국에 있을텐데, 일개 네크로맨서가 불러낸다는 건 생각하기 어렵다. 그리고 불러내는 양상도 그러하다. 죽은 사무엘은 지하에서 올라왔다. 그리고 말하길 '성가시게 군다'고 한다. 이러한 묘사 아래에 깔려있는 생사관은 대략 이런 것이다; 즉, 죽은 사람은 심판을 받아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기보다는 그냥 (죽은 시신을 땅에 매장한다는 사실의 연장선상에서 즉물적으로 도출되는 사후세계인) 지하세계로 들어간다. 거기서는 천국의 복락이나 불타는 지옥의 징벌이 있다기보다는 안식(영면)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후세계는 현대 기독교의 일반적인 사후관과는 확연히 다르고, 오히려 고전시대 그리스의 '하데스'와 더 닮았다. 지복 혹은 징벌로 점철되어 화려한 이미지를 가지는 "현대 기독교적 사후관" 과는 달리 매우 심심한 사후세계가 아닐 수 없다. 애초에 모세오경의 유대교 자체가 개인의 사후세계에 딱히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면이기도 하다. 유대교에 (나중에 기독교에 넘겨주게될) '심판의 개념이 포함된 사후세계관'이 주입된 것은 일반적으로 바빌론 유수 때 배화교의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리고 기독교의 사후관에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런 '하데스'적 요소로부터 연장되어나온 부분이 있다. 예컨대 사도신경을 보면 Credo in Deum Patrem omnipotentem, Creatorem caeli et terrae, et in Iesum Christum, Filium Eius unicum, Dominum nostrum, qui conceptus est de Spiritu Sancto, natus ex Maria Virgine, passus sub Pontio Pilato, crucifixus, mortuus, et sepultus, descendit ad inferos, tertia die resurrexit a mortuis, ascendit ad caelos, sedet ad dexteram Patris omnipotentis, inde venturus est iudicare vivos et mortuos. Credo in Spiritum Sanctum, sanctam Ecclesiam catholicam, sanctorum communionem, remissionem peccatorum, carnis resurrectionem, vitam aeternam. Amen. "descendit ad inferos"라는 구절은, 글자 그대로 말하자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어서) 낮은 곳에 내려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흘째에 되살아났다.) 여기서 inferos는 (위에서 언급한 것 같은) "하데스" 그러니까 지하세계로 이미지화되는 죽은 사람들의 거처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구절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실제로는 죽지 않았고, 반쯤 죽었다가 사흘 동안 다시 회복하여 일어난 것이라는 식의 주장 (의외로 현대까지도 살아남아서 홀거 케르스텐 같은 사람들이 팔아먹은 떡밥)을 부정하기 위해 신앙고백에 들어간 구절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어로는 구교에서는 '고성소'나 좀더 알아먹기 쉬운 '저승'이라고 번역한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그냥 어물쩍 건너뛴다. 외국에서도 일부 개신교파는 이 부분을 건너뛰는 경우가 있으나, 한국은 교파불문 모든 개신교가 이걸 건너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다.) 신앙고백의 뒷부분에 언급되는 carnis resurrectionem(육신의 부활) 역시 이와 관련되어 있다. 즉 죽은 사람들은 사후세계에 육신째로 '묻혀'있다가, 먼 미래에 최후의 심판 때가 오면 단체로 육신째로 부활하여 산 사람과 함께 재림 예수에게 심판을 받아 지옥에 갈지 말지를 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원래 기독교의 신앙고백에서 말하는 최후의 심판의 개요이다. 나는 또 죽은 자들이 인물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그 옥좌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많은 책들이 펼쳐져 있고 또 다른 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책이었습니다. 죽은 자들은 그 많은 책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자기들의 행적을 따라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다는 자기 안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 냈고 죽음과 지옥도 자기들 속에 있는 죽은 자들을 토해 놓았습니다. 그들은 각각 자기 행적대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죽음입니다. 이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요한의 묵시록 20장 (참고로 여기서는 "불바다"가 현대 기독교적 사후관에 등장하는 지옥에 가까운 것이고, 본문의 '지옥'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저승'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이러한 사후관은 "현대 기독교적 사후관"과는 한가지 점에서 중요하게 모순되는 점이 있는데 이는 심판의 성격에 관한 것이다. "현대 기독교적 사후관"에서 심판은 철저히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사건이다. 즉 죽은 사람들 개개인에게 있어 심판이란, 시간적으로는 자신이 죽은 시점, 혹은 그와 인접한 시점에 일어나며, 공간적으로는 개인의 범위에만 영향을 주는 그런 사건이다. 즉 유사이래(적어도 기독교가 존재한 이래) 수많은 개별적인 심판들이 있어왔고 또 (예수 재림까지) 있을 것이다. 반면 정작 신앙고백이나 묵시록에 나오는 '진짜배기' 기독교의 심판은 전혀 다르다. 이 '심판'은 단회성의 사건이다. 이런 심판은 어떤 개인의 죽음에 뒤따라서 일어나는 일이라기보다는, 이 둘은 서로 양립하기 어렵다. 한번 심판을 받아서 이미 지옥행이 결정된 사람들을 나중에 재림때 거창한 이벤트를 열어가면서 다시 새삼 심판하고 지옥에 보내는 것은 아무런 요점 없는 행위처럼 보인다. 그런데, 성경에는 전혀 다른 계열의 흥미로운 사후관도 등장한다. 그것은 대략 이런 것이다. 얼마 뒤에 그 거지는 죽어서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부자는 죽어서 땅에 묻히게 되었다. 부자가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받다가 눈을 들어보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브라함이 라자로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주십시오. 저는 이 불꽃 속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애원하자 아브라함은 '얘야, 너는 살아 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 또한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가로놓여 있어서 여기에서 너희에게 건너가려 해도 가지 못하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건너오지도 못한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도 부자는 또 애원하였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소원입니다.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주십시오. 저에게는 다섯 형제가 있는데 그를 보내어 그들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브라함은 '네 형제들에게는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으니 그들의 말을 들으면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부자는 다시 '아브라함 할아버지,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찾아가야만 회개할 것입니다.' 하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고 대답하였다." 루가 16:22-31 여기서 비로소 "현대 기독교적 사후관"에서 보는 것과 비슷한 이미지가 나타난다. 죽은 후 (이승에서 살았던 삶을 기준으로) 누구는 천국에 가고 누구는 사후세계에서 고통받는 것이다. 참고로 부자가 죽은 후에 간 곳은 악한 자가 벌을 받는 곳으로서의 '지옥'이 아니라 단순히 '죽음의 세계'로, 그 이름으로 보면 앞에서 언급한 '저승', '하데스'와 상당히 비슷하지만 그 성격을 보면 죽은 사람에게 불로 고통을 주는 곳으로서 '지옥'의 이미지에 근접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유대교의 중요 인물인 아브라함은 죽어서 천국에 가 있는데, 이는 앞에서 인용한 죽은 사무엘이 불러내어지는 장면과는 판이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와 "현대 기독교적 사후관"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이 이야기는 심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즉, 이 이야기에서는 사후세계에서의 취급과 연관되는 부자의 악행이나 불신앙, 라자로의 선행이나 믿음 등이 딱히 부각되어 있지 않다. 부자는 베풀지 않았음을 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라자로의 선행은 과연 무엇인가? 본문에서 명백히 언급되어있지만, 라자로가 천국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은 라자로가 착했거나 믿었기 때문이 아니라 생전에 극심한 가난과 고통을 당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자와 거지의 구도에서 이 사후관의 전도(顚倒)적 성격이 드러난다. 이것이 바로 니체가 "원한" 곧 "약자의 도덕" 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니체처럼 극단적으로 보지 않더라도, 이러한 이야기에서는 빈자에 대한 "위안"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 결국 "현대 기독교적 사후관"의 기원은 본래 그 본질에 있어 "심판"이 아니라 "위안", 즉 현세에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삶을 산 사람들이 천국에서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희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전혀 별개의 기원을 가지는) 최후의 심판 이미지와 뒤섞이면서 지금과 같이 생전의 선악을 사후에 보상/처벌한다는 형태로 정립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해본다. 물론 생전의 선악을 사후에 처벌/보상한다는 사후세계의 이미지는 기독교에 고유한 것은 아니다. 서구 외에도 많은 문화권이 기독교와 무관하게 이런 사후세계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밈'은 어디서 발생하여, 어떻게 여러 나라 문화 속으로 퍼져나갔을까. 그것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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