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31 23:59

블로그 메인 페이지



제 블로그를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블로그는 특별한 테마 없이 제가 아무 거나 생각나는대로 글을 쓰는 용도의 블로그이므로 전반적으로 내용물은 잡다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포스팅들이 있습니다. (클릭하면 해당 카테고리로 이동합니다)

음악 : 음악 관련 내용입니다. (거의 클래식 이야기밖에 안나옵니다)

도서 : 도서 관련 내용입니다. 주로 읽은 책에 대한 짤막한 이야기를 씁니다.

O Castitatis Lilium : 백합(장르) 관련 내용입니다.

Kunstidiot : 문화상품(중에서 주로 애니/만화/게임)에 관한 내용입니다.

Military : 밀리터리 관련 내용입니다.

보고 들은 것 : 제가 직접 보거나 들은 것에 관해 쓰는 곳입니다.

WebLog : 제가 인터넷에서 보거나 읽은 것에 관해 쓰는 곳입니다.

뉴스와 현안 : 이런 저런 뉴스나 최근 이슈에 관한 생각을 쓰는 곳입니다.

농담 : 농담삼아 쓴 글들입니다.

잡상노트 : 그냥 이런 저런 잡생각과 뻘짓의 기록입니다.
(아직 졸업못한 중2병 따위가 발산되기도 합니다)





I risk myself offended by allowing anyone to speak anything. This does not apply to others attending conversations.

2022/06/07 19:58

롱노즈 유감


0. 이른바 "롱노즈": 코가 길어보여서 못생긴 들고양이. 디씨냥갤을 필두로 인터넷 일부 집단에서 유전 현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고양이 형질. 믿음의 내용은, '캣맘'들이 코가 길어서 못생긴 들고양이만 남겨두고 잘 생긴 들고양이만 선택적으로 입양해 가서, 남아있는 들고양이들이 차츰 못생긴 형태('롱노즈')로 진화했다는 것. 
(예시: https://www.inven.co.kr/board/maple/2299/7883423)




[문제점]

1. 롱노즈가 존재하는가?


고양이 코가 길어지긴 했는가?


"코가 긴 고양이가 존재한다"

"코가 길어보이는 고양이가 존재한다"
내지 "사람들이 고양이 코가 길어졌다고 느낀다"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한다.


사람의 예에서 보듯이 포유류는 체중이 몇 %만 불고 줄어도 얼굴이 둥글거나 뾰족해보일 수 있는 존재이다. 여기에 더해 고양이는 털빨도 있다. 물론 보는 각도도 압도적인 영향을 준다. 그리고 사진이라고 해서 딱히 객관적인 게 아니다. (얼짱각도라는 게 괜히 있겠는가?)

따라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명확한 방법은 고양이 두개골의 치수를 재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고양이 두개골의 치수를 시계열적으로, 과학적이고 통계적으로 재어본 적이 없다.

과학의 세계에서 이건 '존재하지 않는다'와 거의 동의어이다. 



2. 롱노즈가 존재가능한가?


(1) 고양이 코가 진화적으로 길어질 수는 있는가?

진화되려면 우선 선천적인 형질이어야 하고 유전되어야 한다. 고양이 코가 유전적인 형질이라는 증거가 있는가?

동물의 외형은 분명히 사람의 인공 선택에 의해 변화할 수 있는 형질이긴 하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소련의 은여우 가축화 실험이 있다.

그러나 고양이의 코 길이에 대해서는 유전되는 형질일 것이라는 과학적인 '추측' 이상의 것은 없다. 아무도 실제 (은여우 가축화 같은) 실험으로 귀납적으로 입증하거나, 고양이의 유전자 중에 코의 길이(기준도 불명확하긴 하지만)에 관여하는 유전자들을 밝혀내어 연역적으로 입증한 예가 없다.


(2) 롱노즈의 자칭 '진화 메커니즘'도 문제다.

애초에 들고양이 입양은 우리나라 들고양이의 주된 선택압조차 아니다.
예컨대 서울시에 들고양이가 10만마리가 산다고 가정하자. (서울의 면적은 대략 6만 헥타르, 도시지역의 들고양이 평균 서식 밀도는 1.66마리/ha 정도이므로) 들고양이의 평균 수명이 3년 또는 4년이라고 잡아도 고양이 개체수가 정상상태를 유지하려면 매년 3.3만 내지 2.5만마리가 죽든지 사라져야 한다. 서울에서 매년 길냥이가 2.5만마리나 입양될 수는 절대 없다. 실제 입양 건수는 2.5만마리의 1%라도 되면 다행일 것이다.

"외모선택적 입양"보다 압도적으로 더 많은 고양이 사망 원인들이 고양이에게 선택압을 가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들고양이 유전자 풀에는 항상 집냥이 유전자 - 사람이 선호하고 인위 선택해온 바로 그 고양이 형질 유전자 - 가 끊임없이 흘러들어가고 있다. (애초에 고양이가 거기 왜 있겠는가?)

은여우 가축화 실험은 하다못해 최소한 조금이라도 가축화가 진행된 개체들의 유전자 풀을 원 개체군으로부터 매 세대마다 격리시켰다. 최소한 그정도는 해야 년 단위의 짧은 시간 동안 동물의 표현형을 진화적으로 바꿀 수 있다. 그런 기본조차 안 된 상태에서, 개체 생존 여부에 극히 일부의 영향만 미치는 사람의 인위 선택의 효과가 고작해야 몇년, 길어야 10몇년만에 나온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런 애매하고 불분명한 선택압으로 고양이의 형질이 실질적으로 바뀌려면 개나 소, 말 같은 동물의 가축화 과정과 비슷한 스케일의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 대조되는 예로, 대서양 대구 같은 일부 물고기 종의 크기 감소 현상을 들 수 있는데, 이 경우에도 사람의 어로활동이 개체군 감소의 주된 원인이 될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을 선택적으로 어획한 결과 비로소 수십여년만에 어류의 크기가 대폭 감소한 것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인위 선택에 비하면 캣맘의 입양은 없는 거나 다름아닌 수준이다. 


3. 결론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롱노즈의 증거라고 해보았자, 그냥 대충 코가 길어보이는 고양이 사진들에 불과하다. 누군가가 그럴듯한 롱노즈 이론을 써내고, 커뮤니티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그런가 하고 봤더니 왠지 길어보여서 사진을 찍어올리면 다른 사람들도 그런가~ 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롱노즈는 흔한 인터넷 삼인성호다. 

들고양이 혐오든 캣맘 혐오든 뭐 다 좋은데, 과학 아닌 걸 과학으로 포장하지는 말기를.



-----------


지금 와서 나무위키 롱노즈 항목을 보니, 토론의 결과로 결국 원래의 내용은 대부분 삭제되고, 롱노즈는 존재 여부도 입증되지 않은 인터넷 밈이라는 서술태도로 정리됐다. 다행한 일이다. 



2022/05/31 11:42

SMR은 더 많은 방사능을 발생시킴 WebLog

SMR(소형 모듈형 원자로)이 만능의 에너지 구세주일 것처럼 hype를 받고 있지만 사실 SMR은 그냥 소형 모듈형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종래의 원자력 발전소와 대략 비슷한 종류의 문제를 갖고 있다. 핵폐기물 문제를 포함해서.

Stanford-led research finds small modular reactors will exacerbate challenges of highly radioactive nuclear waste

스탠포드에서 수행된 연구에 따르면 SMR은 종래의 원자로에 비해 방사능 물질을 더 많이 발생시킨다. 약 2배에서 최대 30배까지.

사용후핵연료의 방사능 독성(radiotoxicity)도 50% 더 많다는 결과이다.

크게 2가지의 이유인데,

1. 크기가 작다 = 중성자 탈출 표면적이 넓다 = 노심에서 달아난 중성자에 의해 방사화된 핵폐기물이 더 많다.

2. 크기가 작다 = 핵반응 효율이 떨어진다 = 떨어지는 효율을 보상하기 위해 특수한 연료나 특수한 냉각재, 특수한 운전방식을 사용한다.
(특히 소형 원자로는 연료효율성 측면에서든, 사용후 핵연료 량을 줄이기 위해서든, 높은 burnup을 가지도록 운전되는데 이러면 사용후핵연료에 더 많은 장수명 Actinides가 축적될 수밖에 없다.)


SMR이 각광을 받는 것은 오직 한가지 이유인데, 민간자본이 핵발전에 참여하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자본 투입에서부터 수익 발생까지 이르는 기간이 가스화력에 비해 길다는 핵발전의 단점을 SMR이 해소해줄 것이라고 예측되기 때문이다.

(이 단점에 대해 아주 쉽게 설명해주는 영상: https://youtu.be/cbeJIwF1pVY


그 외에 SMR에 대해 홍보되고 있는 장점은 그냥 SMR이 "소형 모듈화"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취하고 있는 특수한 노형(예컨대 금속냉각로, MSR, VHTR 등)에 의한 장점들이며, 그 장점들은 그런 노형을 갖고서 일반적인 대형 핵발전소를 지어도 얻을 수 있는 장점들이다. 반면 그런 노형에서 오는 단점들은 SMR이 hype를 받고 있을 때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2022/03/16 17:56

무궁화대훈장의 수여에 대한 짧은 고찰

문재인의 무궁화대훈장 이른바 '셀프수여' 논란(예컨대 https://news.imaeil.com/page/view/2022031508091839353)에 관한 여러 논점들.

1. 문재인이 훈장을 받는 데 결격이 있는가?

상훈법제10조(무궁화대훈장) 무궁화대훈장은 우리나라의 최고 훈장으로서 대통령에게 수여하며, 대통령의 배우자, 우방원수 및 그 배우자 또는 우리나라의 발전과 안전보장에 이바지한 공적이 뚜렷한 전직(前職) 우방원수 및 그 배우자에게도 수여할 수 있다.


본조의 전단은 대통령에 대한 규정, 후단은 대통령 이외의 자(배우자, 우방원수 및 그 배우자)에 대한 규정이다. 후단은 금번의 셀프수여 논란과 큰 상관이 없으므로 전단만을 살펴보면,

"무궁화대훈장은 우리나라의 최고 훈장으로서 대통령에게 수여하며"

라고 하므로, 무궁화대훈장 수여의 객체에 대한 요건에는 오직 "대통령"이라는 것밖에 없다. 즉 대통령이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여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업적이 어떠한지는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본조 후단이 뚜렷한 공적을 요건으로 하는 것과 대조된다.) 그러므로 셀프수여 논란에 암시되어 있는 "문재앙 따위가 뭘 잘했다고 훈장이냐" 같은 논란은 애초에 법규에 맞지 않는다.

덤으로, 본조 후단은 "수여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여 임의행위를 규정하고 있지만, 이와 대조하면 본조 전단은 "수여하며" 라고 되어 있으므로, 대통령에 대한 무궁화대훈장 수여는 임의로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니다.


======

2. 굳이 셀프 수여를 했어야만 할까?

이번에는 대통령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수여하면 어떨지, 또는 후임자가 전임자에게 수여할 수 있지 않을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본조 전단의 요건은 앞서 말했듯이 if and only if "대통령" 이다. 그런데 후임자는, 엄밀히 말하면 대통령 취임 전에는 "대통령"이 아니고 "대통령당선인"이다.

대통령직인수에관한법률제3조(대통령당선인의 지위와 권한) ① 대통령당선인은 대통령당선인으로 결정된 때부터 대통령 임기 시작일 전날까지 그 지위를 갖는다.
② 대통령당선인은 이 법에서 정하는 바에 따라 대통령직 인수를 위하여 필요한 권한을 갖는다.


즉 대통령당선인은 대통령이 아니고, 대통령과 구분되는 지위를 가지며, 대통령과 같은 권한이 아니라 "대통령직 인수를 위하여 필요한 권한"을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후임자가 취임 전에 훈장을 받는다면 엄밀히 말하면 대통령 아닌 자에게 무궁화대훈장을 수여하는 것이므로 수훈 요건의 위반이다. 만약 후임자가 취임시에(엄밀히 말하면 대통령 임기 시작일 개시 후)에 훈장을 받는다면 어떨까? 상훈법에서 훈장을 주는 주체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상훈법제7조(서훈의 확정) ② 대통령은 제1항에 따른 서훈에 관한 의안에 대하여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 서훈 대상자를 결정한다.


즉 서훈 대상자를 결정하는 것은 (그 앞의 추천, 심의 절차는 차치하고) 궁극적으로는 "대통령"인 것이다. 그리고 후임자가 대통령에 취임했다면 "대통령"은 바로 후임자이다. 그러므로 후임자가 취임 후에 받는 무궁화대훈장의 서훈 대상 결정의 주체는 바로 그 당시의 대통령인 후임자 본인이다. 결론: 셀프수여.

그리고, 후임자가 퇴임 전후에 즈음하여 전임자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경우에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것과 유사한 문제가 발생할 것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이를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훈장 수여의
형태\시기
전임자 임기
후임자 임기
전임자가 전임자에게
(셀프수여 1)
합법N/A
후임자가 후임자에게
(셀프수여2)
N/A합법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대통령 아닌 자(당선인)에 대한
불법 수여
불가능
(수여 주체인 대통령 = 후임자)
후임자가 전임자에게
불가능
(수여 주체인 대통령 = 전임자)
대통령 아닌 자(전대통령)에 대한
불법수여



즉, 현행법률에 의하면 무궁화대훈장의 합법적인 수훈방법은 오직 "셀프수여"밖에 없다.


=====


3. 수여의 시기에 관한 문제

앞서 결론대로 셀프수여만이 유일한 합법적인 수여 형태라면, 남은 문제는 전임 대통령이 셀프수여 하느냐, 후임 대통령이 셀프수여 하느냐일 것이다. 이는 (수훈 시기에 관한 별도의 규정이 없으므로) 법률로는 따질 수 없고, 무궁화대훈장이라는 훈장을 우리가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의 문제에 관한 것이다.

위에서 고찰한 현행 상훈법제10조 규정, 즉 "대통령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준다"에 비추어볼 때 무궁화대훈장의 성격을 유추할 수 있다. 그것은 대통령에 대한 기본 예우의 일부라는 것으로, 요컨대 무궁화대훈장이란 "예식 때 대통령 옷에 다는 장식품"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대체로 이런 이미지로...

(사진: 2022년 현재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6세 전하)


그렇다는 전제 하에, 내 생각에는 무궁화대훈장의 셀프 수여는 신임 대통령이 하는 것이 맞지, 임기 말 퇴임 직전에 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여담으로, 퇴임 직전 무궁화대훈장 수여라는 전례를 만든 장본인은 다름아닌 노무현인데, 노무현이 그렇게 한 동기는 무궁화대훈장이 임기동안 대통령의 수고에 대한 국민들의 치하로서 받는 것이 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참으로 소박하고 서민적인 노무현스러운 생각이 아닐 수 없다.

국가의 운영이란 때로는 개인의 행실과는 너무나도 다를 때가 있어서, 소박한 사람의 소박한 희망일지라도 그것이 나라 문제에 관한 것일 때에는 간혹 이루 말할 수 없는 오만이 되기도 한다. 이 사례 또한 그러한데, 대통령은 당선 직후에 국민들에게 가장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이고, 퇴임 직전의 대통령이란 행정부 안에서는 다리 저는 오리 같은 존재요 행정부 밖에서는 이게 다 XXX 때문인, 눈물을 마시는 새 같은 존재이다. 이는 해가 뜨고 지며 계절이 갈마드는 것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적어도 단임제 하에서는) 대통령이란 즉위했다가 어느덧 붕어하는 왕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럴진대 대통령이 퇴임에 즈음하여 국민에게 치적으로 치하를 받기를 바란다면 이는 얼마나 오만한 것인가? 그러므로 퇴임직전 대통령의 무궁화대훈장 셀프수여가 말 그대로의 셀프수여 외에 무엇이 되겠는가?


=====



여담 1. 무궁화대훈장의 존치에 관한 문제

무궁화대훈장은 우리나라의 최고 훈장(상훈법제10조)이다.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위인, 선열들이 받는 유수의 훈장보다도 더 높은 지위인 것이다. 과연 이런 훈장이 있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미합중국이 처음 건국될 당시,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결코 왕이나 군주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국가의 대표로서 타국의 군주나 사절들에 대해서는 군주와 같은 의전으로 위엄을 부렸다. 기억할 것은, 그 당시 유럽 문명의 표준은 공화정이 아니라 왕정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워싱턴은 대통령이라는 직책이 공화국인 조국에 결여된 왕다운 명예와 위엄, 위세를 보충해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

국가 최고 훈장을 대통령에게 당연히 수여한다는 것은 이런 관점에서 온 전통적인 요소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현대는 군주정이 표준인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누구나 훈장 그 자체는 명예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고 그 훈장이 표상하는 실체가 명예를 좌우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한다. 대통령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그 지위에 올랐다는 사실 그 자체가 명예인 것이다. 무궁화대훈장은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그렇지만 아예 없으면 허전한 그런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당장 없애기는 뭣한 존재에 대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그런 것에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빛내기 위해 쓰는 불과 몇천만원 정도의 푼돈이 아까운 그런 나라는 아닐 테니까.


=====


여담 2. 무궁화대훈장의 성격의 변경에 관한 문제

무궁화대훈장의 성격을 '정말로 업적이 뛰어났던 대통령에게만 주는 것'으로 바꾸자(예컨대 10조를 개정하여 "재임 중 업적이 현저한 전직 대통령에게 수여하며..." 하는 식으로 규정)는 견해도 가능은 할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건 별로 아름다운 결과를 낳을 가망이 없다. 전대통령의 업적이라는 다대한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을 국가권력이 임의로 평가해서 상훈을 준다는 접근법은 상훈의 적절성 시비에 이어 결국 훈장의 존치 문제로 번질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만약에 전직 대통령이 정말로 뛰어난 공적이 있다면 그냥, 유수의 현존 훈장 중 그 공적에 합당한 것 하나를 주면 그만일 것이다.



2022/03/12 14:24

유럽으로 달려가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우려 도서




George Friedman, "다가오는 유럽의 위기와 지정학(Flashpoints: the emerging crisis in europe)"

이 책은 유럽의 역사적 연원을 다루면서 이의 연장선상에서 유럽연합이 내부와 주변부에서 직면하고 있는 도전들을 지정학적으로 해설하는 책이다. 이 책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러시아의 주변부의 지정학적 문제점에 대해서도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하지만 어차피 2015년에 나온 이 책에서 다루는 분쟁의 가능성 중 상당수는 이미 현실화된 상태이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과 관련하여 내가 이 책에서 특별히 읽어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유럽 연합 - 우크라이나가 열성적으로 일원이 되고 싶어하는 - 의 기저에 깔려 있는 문제점이다.




과거에 겪은 악몽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만든 기구가 유럽연합이었다. 유럽 국가들을 서로 친밀하게 결속시켜 어떤 나라도 평화를 깨거나 다른 나라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풍요로운 곳으로 만든다는 취지였다. 공교롭게도 유럽은 수세기 전부터 다른 나라의 억압을 받는 나라를 해방시키고, 국가의 주권과 자결권을 실현하려고 투쟁해왔다.유럽은 이러한 도덕적 책무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그 때문에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는 모든 나라가 주권을 그대로 보유하되, 아무도 그 주권을 빼앗지 못하도록 모든 나라의 주권을 제약하는 일이었다.

p.43


즉, 유럽연합의 근저를 이루는 요청이 갖고 있는 하나의 모순은 유럽이 민족주의(민족에게 민족국가를 부여하기를 요구하는)를 포기하지 않는 상태에서 통합이라는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흔히 유럽연합조약이라고도 불리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은 "점점 서로 가까워지는 사람들"이라는 개념의 논리적 연장선상에 있다. 이 조약이 의도한 바는 경제 부문을 넘어 사회적 정치적 영역까지 확장되었다. 궁극적으로 이 조약의 도덕적 취지가 가장 중요했다. 이 조약을 통해 유럽국가들을 통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럽인들을 하나로 통일하려고 했다. 한 사람이 지닌 국가적 정체성 몾지않게 유럽인이라는 정체성을 중요하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다.

(중략)

흥미롭게도 이는 남북전쟁에서도 일어났다. 미국인들은 전쟁이 시작될 때 자신을 자기가 속한 주(state)와 동일시했지만 전쟁이 끝나면서 피로 만들어진 단일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를 달성하기가 어려웠다. 첫째, 평화와 번영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구축된 유럽의 통합에서는 어느 것도 피로 만들어질 수 없었다. 둘째, 미국의 주들 사이의 이견은 언어나 문화처럼 바꾸기 어려운 문제들이 아니라, 노예제도 폐지나 경제 구조처럼 전쟁을 통해서라도 결정될 수 있는 사안들이었다.

pp. 198-199



여기서는 앞서 언급한 민족주의의 모순과 함께, 유럽연합의 이상이 지닌 문제점도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럽연합이 유럽 시민에게 약속하는 "사회계약"이 "평화와 번영"이라는 가치를 기초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게 왜 문제인지는 이어서 설명된다.



형제애는 운명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평화와 번영이 구성원들을 결속시키는 유일한 수단이라면, 평화와 번영은 절대로 사라지면 안 된다. 누군 가난해지고 누군 부자가 되고 누군 전쟁을 치르고 누군 그러지 않는다면 운명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을까? 따라서 운명이 나라들을 분열시키기보다는 결속시켜야 한다는 게 유럽이 추구하는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요소였다. 국가 정체성이나 운명 같은 어려운 문제가 제기되지 않도록 하려면 평화와 번영이 계속되어야 했다.

유럽은 유럽인들에게 좋은 것만을 약속했다. 미국은 평화는 그 자체로서 목적이 아니고 사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번영을 약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국은 "보다 완전한 연방"과 "양도할 수 없는 권리"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결속된 나라다. 미국은 각양각색인 사람들을 초월적인 원칙들을 중심으로 결속시킨 나라다. 미국은 평화와 번영을 약속한 적이 없다. 오직 그 가능성만을 약속했을 뿐이다.

유럽연합의 문제는 평화와 번영 말고는 유럽인들에게 제시할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 환희가 무산되면, 평화나 번영이 증발하면 어떻게 될까? 그렇게 되면 무엇이 사람들을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결속시킬까? 무엇이 유럽연합을 결속시킬까?

p.204


평화와 번영이 결속의 유일한 수단인 경우에, 그 평화와 번영이 어쩔 수 없이 끝장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이미 남유럽 채무위기 때 충분히 보았다고 생각한다. (이 책도 그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제 2022년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돌아와서, 위와 같은 모순을 가진 유럽이 우크라이나가 기대하는 것을 줄 수 있을지, 나는 회의적이다. 유럽은 유럽 최빈국 자리를 다투는 우크라이나를 위해 자신의 번영을 나누어주기도 꺼려할 것이고,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해 피를 흘리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유럽 연합의 일원을 위해 다른 나라들의 번영과 평화를 희생하는 것은 유럽 연합이 제일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가 어찌어찌 유럽 연합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더라도, 남유럽이 서유럽과의 경제적 격차 때문에 겪은 것과 같은 문제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더 큰 문제는, 유럽의 반대 방향에는 추종할 만한 가치가 아예 없다는 사실이다. 유럽의 반대편에 있는 것은 인터넷 시쳇말로 '눈 내리는 나이지리아'밖에 없다.(나이지리아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대 슬라브 민족공동체 같은 개념은 러시아 엘리트들의 두개골 외부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엘리트들이 대 슬라브 민족에게 제시하고 있는 가치는 누가 봐도 퇴영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그래서 결국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는 밀쳐내면서도 유럽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실망하는 신세를 전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p.s.

만약 우크라이나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된다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일까?

가장 편의적인 해결책은 분할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지속적으로 국가적 위기를 조성해서 우크라이나 사람들을 한데 묶어준 덕분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는 이미 완성단계이고, 이는 우크라이나의 분할 같은 강대국들에게만 편리한 해결책은 어마어마한 저항 또는 끊임없는 통일 시도라는 불안정성에 직면할 것임을 의미한다. 하기야 이 또한 불안정성을 주변부 국가에게 외주 주는 편리한 방법이기도 하겠지만.(유경험 국가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

또 다른 해결 경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완전히 패배하여 철수하고, 이를 기점으로 아예 대외 영향력을 상실해버리는 경로인데, 이 역시 가능성은 차치하더라도 소망스럽지 않은 경로일 것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 급의 국력 소진을 겪는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 국민들이 길고 거대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점은, 러시아가 강대국의 지위를 완전히 박탈당하고 몰락해버린다면, 이는 유라시아 심장부에 갑작스럽게 지정학적 블랙홀이 등장하는 전지구적 재난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협상한다면 어느 레벨에서 가능할까? 우크라이나는 영토적 단일성을 포기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벨로루스 같이) 완전히 친러 국가로 편입하는 것에 실패한 이상은 최소한 동우크라이나에서의 영토적 이득이라도 챙기려고 할 것이다.(그거라도 달성하지 않으면 푸틴의 정권이 위험할 것.) 협상은 어떤 가능성 있는 합의를 모색하는 장소이기 보다는 서로를 비난해서 우리편을 결속시키는 장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우크라이나 문제는 어느 경로로 풀리더라도 깔끔하게는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보인다. 분쟁 지역 바깥에 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전쟁이 잔인하고 지루해지는 시점, 그리고 시장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산 원자재의 공급 경색에 적응하는 시점에 이르러서 관심이 식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1 2 3 4 5 6 7 8 9 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