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가운데 환빠의 견폐성(犬吠聲)은 많은 반면 역사학계와 "컨센서스"를 공유하는 정론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죠. 그런데 더 불행한 것은, 어쩌면 제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역사학계의 논의조차도 19세기 고종 연간에 있었던 간도 논쟁, 곧 조선말 백성들의 간도 이주로 인해 촉발되어 백두산정계비의 내용 해석으로 흘러간 그 사건과 이후의 경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정계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상세한 논의가 되는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일찍이 기당 이한기 박사의 역작 "한국의 영토"에서 해당 부분을 찾아 읽어본 바로도, 논의의 초점은 주로 구한말에 맞추어져 있고, 정계비의 성립 과정에 관해서는 청측 차사를 따라 백두산 정계 과정에 함께 수행하지 못한 접반사 박권의 실책을 언급하는 정도에 그쳐 있더군요.
국사 교과서에도 소개된 유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구한말 청과 조선의 간도 영토분쟁에서 논쟁이 별 성과를 얻지 못하고 끝난 것은 모두 저 백두산 정계비에 기록된 "동위토문(東爲土門 : 동쪽 국경을 토문강으로 한다)"의 해석에 이견이 좁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에 따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간도"가 조선의 땅이었는지 아닌지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백두산 정계비 자체를 둘러싼 정황을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죠.
백두산 정계비 자체는 이미 일제가 철거하는 만행을 저질러 행방이 불명하지만, 다행히 정계비는 고작해야 300여년 전인 숙종 38년에 건립되었으므로 관련 사료가 충분히 남아있는 편입니다.
먼저 아래의 조선왕조실록 숙종대의 기사를 봅시다.
(청나라 관리와 국경을 논의할 때 어떻게 대처할지 논의하는 부분)숙종 51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3월 23일(병오) 1번째기사
접반사 박권 등이 중국과의 경계를 정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다
접반사(接伴使) 박권이 청대(請對)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청(淸)나라 차관(差官)이 넘어 온 뒤에 연변(沿邊)의 길이 끝나면 응당 백두산 위를 경유하여 갈 것인데, 생각건대, 반드시 험준(險峻)하여 가기 어려울 듯하고, 저 사람들이 만약 억지로 다른 길을 묻는다면 비록 산 남쪽의 길이 연변에서 조금 떨어진 깊은 곳이라 하더라도 또한 장차 지시(指示)하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험준한 곳을 지시하겠지만 억지로 묻는다면 형세상 장차 그렇게 지도(指導)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박권이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정계(定界)한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 백두산 남쪽의 텅 빈 곳은 우리 나라 백성이 들어가 거접(居接)하고 있지 않으니, 저 사람들이 만약 그 곳을 가리켜 그 지경 안이라고 이른다면 근거로 삼아 다툴 만한 문적(文籍)이 없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이미 두 강(江)을 경계로 삼았으면 중간의 육지도 또한 마땅히 강물의 발원(發源)하는 곳을 가로로 끊어 한계(限界)로 삼아야 하니, 이것으로 쟁집(爭執)하되, 저 사람들이 만약 듣지 않는다면 따로 대신(大臣)을 보내는 것도 또한 안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역(疆域)은 지극히 중요하니 반드시 힘써 다투되, 대단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즉시 장문(狀聞)하라.”
하였다. 박권이 또 말하기를,
“장문의 왕복(往復)에 언제나 여러 날이 소요되니, 사기(事機)를 점점 그르치게 됩니다. 큰일 외의 사소한 절목(節目)은 남병사(南兵使)·북병사(北兵使)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적절하게 일을 처리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영인본】 40책 435면【분류】 *외교-야(野) / *군사-관방(關防) / *군사-통신(通信)
이 기사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백두산 정계비가 무엇을 위해, 어떤 맥락하에서 건립되었느냐는 점입니다. 강조 부분(필자가 직접)을 읽어보면, 우선 박권이 백두산 이남에 무인지대가 있고, 그 무인지대 때문에 영토 정립에 문제가 생길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이유의 발언은 더 중요한데, 그의 발언을 통해
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두 강"으로 한다는 인식이 이미 이전부터 확립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당시 청과의 국경 논의에서 주된 현안은 없던 국경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국경으로 사용되고 있는 "두 강"이 발원지인 백두산 근처에서는 경계가 애매해지기 때문에(흔히 있는 일이죠) 이 부분을 확실히 하자는 것이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두 강"이란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도 실록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접반사 박권이 청나라 총관과 만나고 나서 보고한 내용)숙종 51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5월 23일(을사) 1번째기사
접반사 박권이 백두산 정계의 일에 대해 치계하다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치계하기를,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誠實)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영인본】 40책 440면【분류】 *과학-지학(地學) / *군사-관방(關防) / *외교-야(野)
백두산에서 서쪽으로 압록강, 동쪽으로 토문강이 나오는데, 압록강은 일단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토문강에 대해서는 "이것이 두만강의 근원"이라고 언급합니다. 즉, 중국과 조선의 국경으로 사용되는 "두 강"은 압록강과
두만강이며, 청나라 차사 목극등이 찾아와서 백두산에 오른 것 역시 (국경을 확실히 하기 위해)압록강과 두만강의 상류를 찾아 표시하러 온 것이라는 점이 확실해집니다. 그러므로 목극등이 백두산 정계비에 쓴 "동위토문"의 "토문"은 두만강의 상류를 의도하고 쓴 말입니다.
그런데 위의 기사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측 대표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숙종 51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6월 9일(신유) 3번째기사
사헌부에서 백두산 정계의 일에 태만한 접반사 박권 등을 파직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장령 구만리(具萬里)이다.】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새로 아뢰기를,
“저 사람들의 백두산 행차에 사명(使命)을 맡은 신하가 진실로 마땅히 함께 가야 하는데도,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는 대신 편비(偏裨)를 보내고 모두 물러나 앉아 몸이 쇠약하고 늙었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백두산의 길이 비록 험난하다고 하지만 차원(差員) 이하가 모두 통행(通行)했으니, 접반사와 함경 감사만 유독 가지 못한단 말입니까? 경계(境界)를 정하는 막중한 일에 다만 1장(張)의 수본(手本)으로 상문(上聞)하였을 뿐, 물의 근원을 다투어 논할 즈음에는 이미 목격(目擊)하지도 않고 단지 ‘예예’하고 답하기만 하였으니, 사명을 맡긴 뜻이 어찌 제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까. 청컨대 박권과 이선부를 모두 파직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북병사(北兵使) 장한상(張漢相)은 비국(備局)에서 강의 근원을 끝까지 찾아서 지형(地形)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는데도, 이미 직접 살피지 않고 다만 장교(將校)의 거짓 보고에 빙거(憑據)하여 흐리멍덩하게 치계(馳啓)하였으니, 높은 체하여 편안함을 도모하는 버릇이 이미 지극히 해괴합니다. 심지어는 장교배(將校輩)가 그릇 전한 말로 적당히 꾸며 상문(上聞)하였으니, 부지런하지 않고 직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 이보다도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0책 442면【분류】 *외교-야(野) / *사법-탄핵(彈劾) / *과학-지학(地學)
즉, 조선측 대표로 목극등을 따라간 박권 등은, 실제로는 백두산에 오르지 않고 부하들만 딸려보냈습니다. 그래서 결국 청나라 대표 목극등은, 어느 물길이 어느 물길이니 경계를 이렇게 정한다 운운하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서 정계비를 세우고 내려왔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조선측 대표들은 농땡이 쳤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대충 일을 했기 때문이겠지만, 결과적으로 나중에 백두산에 경계 표시를 하는 공사가 진행되던 도중 매우 큰 문제가 하나 터지게 되는데요, 그 문제가 논의되는 과정을 통해 중요한 점을 하나 알 수 있습니다.
(좀 긴 기사라서 길이의 압박이 있습니다.......)
숙종 52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12월 7일(병진) 3번째기사
백두산 정계가 잘못된 것에 대한 겸문학 홍치중의 상소. 이에 대한 논의와 거산 찰방 허양의 공술 내용
이때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가 백두산(白頭山)에 푯말 세우는 역사(役事)를 거의 다 끝냈다는 뜻으로 계문(啓聞)하였다. 겸문학(兼文學) 홍치중(洪致中)이 일찍이 북평사(北評事)로서 푯말을 세우던 초기에 가서 살펴보고, 상소하여 그 곡절을 진달하기를,
“신(臣)이 북관(北關)에 있을 때 백두산의 푯말 세우는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저 백두산의 동쪽 진장산(眞長山)안에서 나와 합쳐져 두만강(豆滿江)이 되는 물이 무릇 4갈래인데, 그 중에 가장 남쪽의 네번째 갈래는 곧 북병사(北兵使) 장한상(張漢相)이 가장 먼저 가서 살펴보려 하였다가 빙설(氷雪)에 막혀 전진(前進)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 북쪽의 세번째 갈래는 곧 북우후(北虞候) 김사정(金嗣鼎) 등이 추후(追後)로 간심(看審)한 곳이고, 그 북쪽의 두번째 갈래는 곧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 청차(淸差)가 나왔을 때 도로(道路)에 관한 차원으로서 따라갔다가 찾아낸 것입니다. 그 가장 북쪽의 첫번째 갈래는 수원(水源)이 조금 짧고 두 번째 갈래와 거리가 가장 가깝기 때문에 하류(下流)에서 두번째 갈래로 흘러 들어 두만강의 최초의 원류(源流)가 된 것이고, 청차가 가리키며 ‘강의 원류가 땅속으로 들어가 속으로 흐르다가 도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한 것은 첫번째 갈래의 북쪽 10여 리 밖 사봉(沙峰)밑에 있는 것입니다. 당초 청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두루 찾을 때 이 지역에 당도하자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 ‘이것이 곧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陸地)로 해서 길을 갔습니다. 두 번째 갈래에 당도하자, 첫번째 갈래가 흘러와 합쳐지는 것을 보고 ‘그 물이 과연 여기서 합쳐지니, 그것이 토문강의 근원임이 명백하고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경계(境界)를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여러 수원의 갈래로 경계를 정하게 된 곡절의 대략입니다.
신(臣)이 여러 차사원(差使員)들을 데리고 청차가 이른바 강의 수원이 도로 들어가는 곳이란 곳에 도착하자, 감역(監役)과 차원(差員) 모두가 하는 말이 ‘이 물이 비록 총관(摠管)이 정한 바 강의 수원이지만, 그때는 일이 급박하여 미처 그 하류(下流)를 두루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푯말을 세우게 되었으니 한 번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허(許)와 박(朴)【거산 찰방(居山察訪) 허양(許樑)과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다.】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차(淸差)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하류(下流)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臣)이 여러 차원들과 함께 상의하기를, ‘이미 잘못 잡은 강의 수원을 비록 마음대로 우리가 변경할 수는 없지만, 하류가 어떠한지는 논할 것 없이 물의 흐름이 끊어진 곳 이상은 진실로 마땅히 푯말을 세우는 안이 되어야 하니, 먼저 비(碑)를 세운 곳에서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되, 나무가 없고 돌만 있으면 돌로 쌓아 돈대를 만들고 나무만 있고 돌이 없으면 나무를 베어 목책(木柵)을 세우기로 한다. 오늘날 조정의 명령이 당초부터 한 차례 거행으로 역사를 마치려는 뜻이 아니었으니, 빨리 마치려고 하지 말고 오직 견고하게 하기를 힘쓰되 이른바 물이 나오는 곳에까지 이르지 아니하여 우선 역사를 정지하고 돌아간다. 강의 수원을 변통하는 것에 있어서는 서서히 조가(朝家)의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내년 역사를 계속할 때 진퇴(進退)하는 바탕으로 삼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더니, 차원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뒤에 들으니, 허양(許樑) 등이 미봉(彌縫)하는 데만 급급하여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목책을 두 번째 갈래의 수원에다 대놓았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목책이 끝나는 곳은 바로 국경의 한계가 나누어지는 곳입니다. 두 나라의 경계를 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한 두 차원의 뜻만으로 조정에서 알지도 못하는 물에다 강역(疆域)을 제멋대로 정했으니, 이는 마땅히 징치(懲治)하여 강토에 관한 일을 중히 여김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강의 수원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또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보다 좋은 대로 잘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유(李濡)가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목차(穆差)가 정한 수원(水源)은 이미 잘못된 것인데, 차원들이 감사(監司)에게 말하지도 않고 평사(評事)의 지휘도 듣지 아니한 채 멋대로 푯말을 세웠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습니다. 청컨대 잡아다 추문(推問)하고, 감사도 또한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박권(朴權)이 아뢰기를,
“홍치중의 상소에 보건대, 수원(水源) 중에 최초의 한 갈래는 곧 목차가 정한 것인데, 이번에 세우는 푯말은 안쪽으로 거의 20리 가량 옮겨 세웠다고 했습니다. 만일 뒷날 그들이 와서 보고 멋대로 옮긴 까닭을 묻는다면 무슨 말로 답하겠습니까. 목차가 정한 물이 비록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해도 진장산(眞長山) 밖을 굽어 돌아 흘러내려 가는 것인 듯하고, 그 사이의 연무(延袤)16360) 가 비록 넓다 하지만 이미 목차가 정한 것이니 이대로 한계를 작정해도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끝내 과연 북쪽으로 뻗어나가 두만강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목차에게 말을 전하되, ‘당초에 정한 것은 잘못 안 것 같다.’고 한다면, 그들이 마땅히 답변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유가 아뢰기를,
“그들이 이미 경계(境界)를 정하고 돌아간 뒤 이러한 잘못이 있음을 우리 쪽에서 발단(發端)하여 그들을 견책(譴責)받게 하는 것은 또한 불편한 데 관계됩니다. 우선 목차에게 연유를 묻고 답변을 얻어 본 다음에 요량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겠는데, 시급하게 다시 간심(看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도내(道內)의 수령(守令)들 중에서 일을 잘 아는 사람을 차원(差員)으로 택정(擇定)하여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본도(本道)로 하여금 다시 가서 자세히 살펴보고 계문(啓聞)하도록 하였다. 이유가 또 청하기를,
“접반사(接伴使) 또는 감사(監司)가 데리고 간 군관(軍官) 중에서 한 사람을 가리고, 선전관(宣傳官)과 무신(武臣) 중에서 또 한 사람을 가려 보내어 차원들과 함께 간심(看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 이유(李濡)가 또 연석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감사(監司)의 군관 조태상(趙台相)에게 명하여 무산 부사(茂山府使) 민제장(閔濟章)과 함께 그 고장 사람을 데리고 함께 가서 수원(水源)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소서.”
하고, 좌참찬(左參贊)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북병사(北兵使)가 전관(專管)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마는, 만일 경관(京官)을 보내려고 한다면, 조태상으로는 사체가 중대해지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한성군(韓城君) 이기하(李基夏)는 아뢰기를,
“문관(文官) 재상(宰相)을 가려서 보내야 사체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북병사 이택(李澤)은 늙어 험한 곳을 다니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문신(文臣) 중에 당상관(堂上官)을 가려서 보내라고 명하였다. 우참찬 김진규(金鎭圭)가 상소하여 조신(朝臣)을 차출하여 보냄은 불가하다고 논하였는데, 이르기를,
“물이 땅속으로 흐르고 있는 곳에 푯말을 세움은 목차(穆差)가 앞서 한 말이 있으니 비록 우리 편의 관원이 단독으로라도 할 수 있습니다마는, 수원의 갈래가 어느 땅으로 들어갔는지를 살펴보는 것에 있어서는 저들의 차원과 함께 하지 않고 현탁(懸度)16361) 한 말만 가지고 할 수 없습니다. 저들의 차원 없이 단지 조신(朝臣)만 보내어 도로(道路)가 저쪽에 속하는지 이쪽에 속하는지를 불구하고 오직 수원만 찾기에 힘쓴다면, 이것이 과연 봉강(封彊)을 신중하게 지키는 도리이겠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전하(殿下)께서 대신의 말에 따라, ‘목차(穆差)가 경계를 정하고 돌아간 뒤에 이러한 잘못이 있는데, 만일 곧장 그 나라에 주문(奏聞)한다면 그가 편하지 못할 것이니, 우선 통문(通問)하여 회답을 보고 처리하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신(臣)은, ‘국경에 관한 일은 이미 중요한 것이어서, 정한 경계에 과연 잘못이 있다면 사리상 마땅히 그 나라에 먼저 알려 다시 간심(看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그 나라에 알리지 않고 사사로이 그 신하에게 말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허양(許樑)과 박도상(朴道常)이【곧 그때의 차원으로서 잡혀 와 추문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미 잡혀 와 있으니 마땅히 이 무리들을 아울러 사핵(査覈)하여 더 자세한 것을 알아내고, 혹은 저들의 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거나 혹은 주문하여, 피차가 함께 간심하기를 청해야 거의 두루 상세하고 정대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유가 또 임금에게 아뢰기를,
“김진규의 소가 대체에 있어서 진실로 옳습니다. 직질(職秩)이 높은 관원이 경솔하게 그들의 땅에 들어감은 과연 편리하지 않으니, 차원들을 잡아 오기를 기다렸다가 자세하게 물어본 다음에 의논해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 상소에 또 ‘목차에게 사사로이 물어서는 안되고 마땅히 자문을 보내거나 주문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대신의 의견이 모두 편리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차가 견책(譴責)받는 것은 아직 말할 것이 없고, 만일 저들이 다른 차원을 보내 다시 간심한다면 목차처럼 순편(順便)할지 보장하기 어려운데다가, 혹은 경계를 정하는 곳에 있어서 도리어 변개(變改)하여 감축(減縮)하는 우려가 있다면 득실(得失)에 큰 관계가 있을 것이니, 먼저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그 고장 사람 중에서 일을 잘 아는 사람을 가려 보내 편리한 대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고 계문(啓聞)한 뒤 상의(商議)하여 처리함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 다시 그대로 따라, 문신(文臣) 당상관은 아직 차출해 보내지 말고, 먼저 도신으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사람을 보내 자세히 살펴보고 계문하게 하고, 또 차원을 잡아다 추문하기를 기다린 뒤에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에 차원 허양(許樑)과 박도상(朴道常) 등은 잡혀 왔으나 사령(赦令)으로 인해 용서받았는데, 비국(備局)에서 불러다 물어보니, 허양 등이 공술하기를,
“백두산 도형(圖形)을 가지고 말한다면 목차(穆差)가 지적한 소류(小流)가 첫번째 갈래가 되고, 도로 차사원(道路差使員) 박도상과 갑산(甲山) 사람들이 지적한 바 수원(水源)이 솟아나는 곳, 즉 지금 푯말을 세운 곳이 두번째 갈래가 되며, 송태선(宋太先)이 지적한 바 물이 솟아나는 곳이 세번째 갈래가 됩니다. 당초 목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왔을 때, 박도상과 갑산의 길을 인도하는 사람 등을 먼저 두만강의 물이 솟아나는 곳으로 보내어 기다리도록 했는데, 목차 또한 뒤쫓아와서 물이 솟아나는 곳에서 채 10여 리쯤 못미쳐 하나의 소류(小流)를 발견하자 말을 멈추고 지적하기를, ‘이 산의 형세를 보건대 이 물은 응당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겠다.’고 범범하게 말했고, 곧장 두번째 갈래 수원(水源)의 머리 밑 4, 5리쯤 되는 곳에 이르러서는 목차가 이에 ‘이 물은 원래의 갈래가 분명하니, 내가 그 발원하는 곳까지 가 볼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군관(軍官) 조태상(趙台相) 한 사람만 혼자 가서 발원한 곳을 살펴보았고, 목차 일행들은 흐름에 따라 내려가다가 4, 5리를 지나지 않아 또 소류(小流)가 북쪽으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것을 발견하자, ‘앞서 발견한 첫번째 갈래의 물이 흘러와 이리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또 20리를 더 가 지숙(止宿)하는 곳으로 내려왔을 때 목차가 우리 나라의 여러 사람들을 초치(招致)하여 산도(山圖)를 내보이며, ‘첫번째 갈래의 물에다 목책(木柵)을 세우면 당신네 나라에서 말하고 있는 물이 솟아나는 곳에 견주어 10여 리나 더 멀어지게 되니, 당신네 나라에서 땅을 많이 얻게 되어 다행이다.’라고 하므로, 따라간 일행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의심없이 믿고, 중간의 8, 9리는 다시 간심(看審)하지 아니한채 그대로 흐름을 따라 내려와, 노은동산(盧隱東山)을 지나 어윤강(漁潤江)에 있는 사신(使臣)이 머무는 곳으로 와서 모였습니다.
8월 초순에 순찰사(巡察使)가 비국(備局)의 관문(關文)에 따라 다시 백두산에 푯말을 세우는 차원(差員)으로 차출했기 때문에 경성(鏡城)으로 달려가서 북평사(北評事)와 함께 역군들을 데리고 역사할 곳으로 갔는데, 데리고 간 장교(將校) 손우제(孫佑齊)와 박도상(朴道常) 및 무산(茂山) 사람 한치익(韓致益) 등과 함께 가서 30여 리를 가며 찾아보니, 수세(水勢)가 점점 커지며 북쪽을 향해 흘러갔고 두만강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30리를 오가는 동안 피인(彼人)들이 다닌 자취가 있었기 때문에, 손우제는 혹 피인들과 서로 만나게 될까 염려하여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며 번번이 뒤쳐졌고, 한치익은 또한 ‘저는 변방 국경에서 생장한 사람이기에 피차(彼此)의 지형을 잘 알고 있는데, 이 물은 분명히 북쪽으로 흘러가고 두만강으로는 들어가지 아니합니다. 만일 혹시라도 두만강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한다면 뒷날에 제가 마땅히 터무니없이 속인 죄를 입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목차가 말한 바 소류(小流)가 흘러 와 합쳐지는 곳이란 데를 다시 간심(看審)해 보았더니, 곧 산골짝 사이의 몇 리 쯤에서 곁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 평사(評事)에게 보고했더니, 물이 솟아나는 곳에 이르러서는 우선 역사를 정지하되 품하여 결정하기를 기다린 뒤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당초 저들과 우리 나라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내려올 때 바로 지금 푯말을 세우는 곳에서부터 아래의 대홍단(大紅丹)까지는 각각 2일 반의 길이었는데, 목차가 지적한 첫번째 갈래라는 곳과 바로 지금 푯말을 세우는 곳의 중간에서부터 미미한 언덕이 시작되어 그대로 진장산(眞長山)이 되었고, 구불구불 내려가 무산(茂山)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사이에는 원래 다른 물이 내려와 합쳐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또 목차가 지적한 첫번째 갈래에서 바로 지금 푯말을 세우는 곳까지는 거리가 대략 10리 가량이었고, 평사(評事)가 말한 첫번째 갈래는 곧 목차가 지적한 소류(小流)가 내려와 합쳐지는 곳인데, 지금 푯말을 세우는 곳과 거리가 몇 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목차가 지적한 물이 이미 잘못 본 것이라면, 박도상(朴道常)과 갑산 사람들이 지적한 두번째 갈래는 원류(源流)임이 분명하여 조금도 의심스러운 잘못이 없는 것이니, 이곳에다 푯말을 세우는 것 외에는 다시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평사가 말한 첫번째 갈래는 원래 산골짝 사이의 몇 리 남짓에서 옆으로 나온 세류(細流)이었으니 결단코 이를 가지고 물이 솟아나는 곳이라고 지적할 수 없으며, 만일 기필코 목책(木柵)을 이 물로 놓으려고 한다면 원류(源流)임이 분명한 상류(上流)를 버려 두고, 8, 9리 쯤을 돌아 내려가 비로소 푯말을 세워야 하니, 또한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또 흐름이 끊어진 곳에서 물이 솟아나는 곳까지의 사이에 북쪽으로 향한 소류(小流)가 5, 6갈래나 되고, 물이 솟아나는 곳에서 아래로 남증산(南甑山)까지의 소류로서 두만강으로 들어가는 것이 4, 5갈래인데, 숲이 하늘에 닿아 지척(咫尺)을 분간할 수 없는 곳에 소류(小流)가 이처럼 혼잡하므로 무식하고 얕은 생각으로는, 만일 뒷날 차원(差員)이 잘못 알고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에다 목책을 세운다면 앞으로 염려가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영문(營門)을 오가는 동안에 반드시 1순(旬) 또는 1달을 허비하게 되므로 사세로 보아 외딴 국경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지친 백성들이 4, 5일의 길에 여러 차례 역사에 동원되어 폐해가 적지 않았습니다. 한결같이 형편에 따라 우선 푯말을 세우고 시급히 영문에 달려가 자세하게 실상을 진달하는 것이 무방할 듯하였기에, 여러 차원(差員)들과 함께 의논한 다음 비(碑)를 세운 곳에서 아래로 25리까지는 혹은 목책을 세우고 혹은 돌을 쌓았고, 그 아래의 물이 나오는 곳 5리와 건천(乾川) 20여 리는 산이 높고 골짝이 깊으며 내[川]의 흔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푯말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또 그 밑으로 물이 솟아나오는 곳까지의 40여 리는 모두 목책을 세우되, 그 중간의 5, 6리는 이미 나무나 돌도 없고 또한 토질이 강하기에 단지 흙으로 돈대만 쌓았습니다. 전후의 실상이 이러한 데 불과합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이로 계주(啓奏)하고, 또 그들이 올린 도본(圖本)을 올렸다.
이어 복주(覆奏)하기를,
“자신들을 해명한 말이라 그대로 믿기 어려우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손우제(孫佑齊) 등 각 사람과 조태상(趙台相)에게 사문(査問)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하되, 그들이 공술(供述)한 것을 가지고 피차(彼此)의 동이(同異)를 고찰해 보고 서서히 다시 간심(看審) 여부(與否)를 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영인본】 40책 472면【분류】 *외교-야(野) / *군사-관방(關防)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註 16360]연무(延袤) : 길이 넓이. ☞ [註 16361]현탁(懸度) : 멀리서 헤아림. ☞ 긴 내용을 대충 요약정리하자면
0. 백두산 근처 두만강 상류 물길은 원래 좀 골아픈듯.
1. 목극등이 정계비에 토문강이라고 쓴 것은 두만강의 상류라고 생각했기 때문.
2. 그런데 이것은 목극등이 지형을 제대로 살피지 않아 착각했기 때문이고, 실제 목극등이 본 토문강은 두만강과 별개의 강이다.
3. 이 "토문강"은 만주 안쪽으로 계속 올라가는 방향으로 흐르는 강이라서 실제로 조선-중국 국경으로 삼을 수 없다.
4. 이건 처음엔 아무도 몰랐다가, 실제로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푯말 등을 설치하는 공사를 하던 중에 알게 됨.
5. 국경을 토문강으로 잘못 정했는데 이거 어떡하지?
......여기서 우리는 이 대화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의문조차 품고 있지 않는 근본 전제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선과 중국 사이의 국경은 기본적으로 두만강이라고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죠. 정계비가 세워지고 있던 당시만 해도, 애초에
조선인들 스스로가 두만강 너머 북쪽은 조선의 땅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정황상 분명해 보입니다. 즉, 비록 비문에서는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고 써놨지만 실은 당대 조선인들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뭐, 당시 국왕에서부터 하급 관원들까지 전부 민족반역모화사대식민사관에 쩔어서 그랬다면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러므로 소위 간도, 곧 두만강 너머 일부지역에 우리나라가 주권을 행사한 적은, 적어도 조선후기까지는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선 말기 고종무렵에 조선-청 국경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 및 조선 관원의 파견도 단순히 조선말기에 국한된 현상일 수밖에 없으며, 법적으로 그 지역에 우리나라가 주권을 행사한 것은 오로지 구한말 서구 및 일본 제국주의를 통해 청이 약화된 무렵부터 을사늑약 이후 간도협약이 체결된 시점까지의 고작 수십여년간 뿐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1885년과 1887년에 있었던 "동위토문"의 국경선 논쟁에서 이중하의 주장도 결과적으로는 근거가 약한 것이 되는 셈이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과연 간도를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생활공간이었다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발해 멸망 이후 근 1천여년간 이 지역이 우리나라에 포함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으며, 오로지 구한말 아주 잠깐 동안 영향력이 미쳤다는 것 때문에 우리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식이라면, 심지어 일본이 독도를 가져가야 한다는 따위의 주장도 또한 정당화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참고 :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정계비 건립당시의 이런 문제가 먼 훗날 고종대에 일어난 조청간 국경 논쟁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관해서는 슈타인호프님께서 아주 상세한 글을 써주셨기 때문에, 이 경과가 궁금하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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