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5/05 18:21

간도 떡밥 Revisited WebLog


간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가운데 환빠의 견폐성(犬吠聲)은 많은 반면 역사학계와 "컨센서스"를 공유하는 정론은 부족한 것이 사실이죠. 그런데 더 불행한 것은, 어쩌면 제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역사학계의 논의조차도 19세기 고종 연간에 있었던 간도 논쟁, 곧 조선말 백성들의 간도 이주로 인해 촉발되어 백두산정계비의 내용 해석으로 흘러간 그 사건과 이후의 경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정계비 그 자체에 대해서는 상세한 논의가 되는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일찍이 기당 이한기 박사의 역작 "한국의 영토"에서 해당 부분을 찾아 읽어본 바로도, 논의의 초점은 주로 구한말에 맞추어져 있고, 정계비의 성립 과정에 관해서는 청측 차사를 따라 백두산 정계 과정에 함께 수행하지 못한 접반사 박권의 실책을 언급하는 정도에 그쳐 있더군요.




국사 교과서에도 소개된 유명한 이야기에 따르면, 구한말 청과 조선의 간도 영토분쟁에서 논쟁이 별 성과를 얻지 못하고 끝난 것은 모두 저 백두산 정계비에 기록된 "동위토문(東爲土門 : 동쪽 국경을 토문강으로 한다)"의 해석에 이견이 좁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즉, 토문이 두만강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송화강으로 흘러들어 북동쪽 연해주 너머로 끝없이 뻗어가는) 말 그대로의 토문강이냐에 따라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간도"가 조선의 땅이었는지 아닌지가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백두산 정계비 자체를 둘러싼 정황을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죠.



대략 이만한 크기의 땅이 걸린 문제



백두산 정계비 자체는 이미 일제가 철거하는 만행을 저질러 행방이 불명하지만, 다행히 정계비는 고작해야 300여년 전인 숙종 38년에 건립되었으므로 관련 사료가 충분히 남아있는 편입니다.



[보기]




먼저 아래의 조선왕조실록 숙종대의 기사를 봅시다.


(청나라 관리와 국경을 논의할 때 어떻게 대처할지 논의하는 부분)
숙종 51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3월 23일(병오) 1번째기사
접반사 박권 등이 중국과의 경계를 정하는 일에 대해 논의하다


접반사(接伴使) 박권이 청대(請對)하여 임금에게 아뢰기를,

“청(淸)나라 차관(差官)이 넘어 온 뒤에 연변(沿邊)의 길이 끝나면 응당 백두산 위를 경유하여 갈 것인데, 생각건대, 반드시 험준(險峻)하여 가기 어려울 듯하고, 저 사람들이 만약 억지로 다른 길을 묻는다면 비록 산 남쪽의 길이 연변에서 조금 떨어진 깊은 곳이라 하더라도 또한 장차 지시(指示)하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처음에는 험준한 곳을 지시하겠지만 억지로 묻는다면 형세상 장차 그렇게 지도(指導)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박권이 말하기를,

“저 사람들이 정계(定界)한다고 말을 하고 있는데, 백두산 남쪽의 텅 빈 곳은 우리 나라 백성이 들어가 거접(居接)하고 있지 않으니, 저 사람들이 만약 그 곳을 가리켜 그 지경 안이라고 이른다면 근거로 삼아 다툴 만한 문적(文籍)이 없습니다.

하고,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이유(李濡)가 말하기를,

이미 두 강(江)을 경계로 삼았으면 중간의 육지도 또한 마땅히 강물의 발원(發源)하는 곳을 가로로 끊어 한계(限界)로 삼아야 하니, 이것으로 쟁집(爭執)하되, 저 사람들이 만약 듣지 않는다면 따로 대신(大臣)을 보내는 것도 또한 안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강역(疆域)은 지극히 중요하니 반드시 힘써 다투되, 대단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반드시 즉시 장문(狀聞)하라.”

하였다. 박권이 또 말하기를,

“장문의 왕복(往復)에 언제나 여러 날이 소요되니, 사기(事機)를 점점 그르치게 됩니다. 큰일 외의 사소한 절목(節目)은 남병사(南兵使)·북병사(北兵使)와 더불어 서로 의논하여 적절하게 일을 처리할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영인본】 40책 435면【분류】 *외교-야(野) / *군사-관방(關防) / *군사-통신(通信)





이 기사에서 눈여겨 볼 부분은, 백두산 정계비가 무엇을 위해, 어떤 맥락하에서 건립되었느냐는 점입니다. 강조 부분(필자가 직접)을 읽어보면, 우선 박권이 백두산 이남에 무인지대가 있고, 그 무인지대 때문에 영토 정립에 문제가 생길 것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이유의 발언은 더 중요한데, 그의 발언을 통해 조선과 중국의 국경을 "두 강"으로 한다는 인식이 이미 이전부터 확립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당시 청과의 국경 논의에서 주된 현안은 없던 국경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국경으로 사용되고 있는 "두 강"이 발원지인 백두산 근처에서는 경계가 애매해지기 때문에(흔히 있는 일이죠) 이 부분을 확실히 하자는 것이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두 강"이란 무엇이었습니까? 여기에 대해서도 실록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접반사 박권이 청나라 총관과 만나고 나서 보고한 내용)
숙종 51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5월 23일(을사) 1번째기사
접반사 박권이 백두산 정계의 일에 대해 치계하다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치계하기를,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誠實)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영인본】 40책 440면【분류】 *과학-지학(地學) / *군사-관방(關防) / *외교-야(野)




백두산에서 서쪽으로 압록강, 동쪽으로 토문강이 나오는데, 압록강은 일단 확실하게 알 수 있는데 토문강에 대해서는 "이것이 두만강의 근원"이라고 언급합니다. 즉, 중국과 조선의 국경으로 사용되는 "두 강"은 압록강과 두만강이며, 청나라 차사 목극등이 찾아와서 백두산에 오른 것 역시 (국경을 확실히 하기 위해)압록강과 두만강의 상류를 찾아 표시하러 온 것이라는 점이 확실해집니다. 그러므로 목극등이 백두산 정계비에 쓴 "동위토문"의 "토문"은 두만강의 상류를 의도하고 쓴 말입니다.

그런데 위의 기사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측 대표가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숙종 51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6월 9일(신유) 3번째기사
사헌부에서 백두산 정계의 일에 태만한 접반사 박권 등을 파직할 것을 청하다


사헌부(司憲府)에서【장령 구만리(具萬里)이다.】 앞서의 계사를 거듭 아뢰고 또 새로 아뢰기를,

“저 사람들의 백두산 행차에 사명(使命)을 맡은 신하가 진실로 마땅히 함께 가야 하는데도,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는 대신 편비(偏裨)를 보내고 모두 물러나 앉아 몸이 쇠약하고 늙었다는 핑계를 대었습니다. 백두산의 길이 비록 험난하다고 하지만 차원(差員) 이하가 모두 통행(通行)했으니, 접반사와 함경 감사만 유독 가지 못한단 말입니까? 경계(境界)를 정하는 막중한 일에 다만 1장(張)의 수본(手本)으로 상문(上聞)하였을 뿐, 물의 근원을 다투어 논할 즈음에는 이미 목격(目擊)하지도 않고 단지 ‘예예’하고 답하기만 하였으니, 사명을 맡긴 뜻이 어찌 제 마음대로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까. 청컨대 박권과 이선부를 모두 파직하소서.”

하고, 또 논하기를,

“북병사(北兵使) 장한상(張漢相)은 비국(備局)에서 강의 근원을 끝까지 찾아서 지형(地形)을 자세히 살피게 하였는데도, 이미 직접 살피지 않고 다만 장교(將校)의 거짓 보고에 빙거(憑據)하여 흐리멍덩하게 치계(馳啓)하였으니, 높은 체하여 편안함을 도모하는 버릇이 이미 지극히 해괴합니다. 심지어는 장교배(將校輩)가 그릇 전한 말로 적당히 꾸며 상문(上聞)하였으니, 부지런하지 않고 직책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 이보다도 심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나문(拿問)하여 정죄(定罪)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0책 442면【분류】 *외교-야(野) / *사법-탄핵(彈劾) / *과학-지학(地學)




즉, 조선측 대표로 목극등을 따라간 박권 등은, 실제로는 백두산에 오르지 않고 부하들만 딸려보냈습니다. 그래서 결국 청나라 대표 목극등은, 어느 물길이 어느 물길이니 경계를 이렇게 정한다 운운하며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서 정계비를 세우고 내려왔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조선측 대표들은 농땡이 쳤습니다. 아마도 이렇게 대충 일을 했기 때문이겠지만, 결과적으로 나중에 백두산에 경계 표시를 하는 공사가 진행되던 도중 매우 큰 문제가 하나 터지게 되는데요, 그 문제가 논의되는 과정을 통해 중요한 점을 하나 알 수 있습니다.

(좀 긴 기사라서 길이의 압박이 있습니다.......)



숙종 52권, 38년(1712 임진 / 청 강희(康熙) 51년) 12월 7일(병진) 3번째기사
백두산 정계가 잘못된 것에 대한 겸문학 홍치중의 상소. 이에 대한 논의와 거산 찰방 허양의 공술 내용


이때 함경 감사(咸鏡監司) 이선부(李善溥)가 백두산(白頭山)에 푯말 세우는 역사(役事)를 거의 다 끝냈다는 뜻으로 계문(啓聞)하였다. 겸문학(兼文學) 홍치중(洪致中)이 일찍이 북평사(北評事)로서 푯말을 세우던 초기에 가서 살펴보고, 상소하여 그 곡절을 진달하기를,

“신(臣)이 북관(北關)에 있을 때 백두산의 푯말 세우는 곳을 살펴보았습니다. 대저 백두산의 동쪽 진장산(眞長山)안에서 나와 합쳐져 두만강(豆滿江)이 되는 물이 무릇 4갈래인데, 그 중에 가장 남쪽의 네번째 갈래는 곧 북병사(北兵使) 장한상(張漢相)이 가장 먼저 가서 살펴보려 하였다가 빙설(氷雪)에 막혀 전진(前進)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 북쪽의 세번째 갈래는 곧 북우후(北虞候) 김사정(金嗣鼎) 등이 추후(追後)로 간심(看審)한 곳이고, 그 북쪽의 두번째 갈래는 곧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 청차(淸差)가 나왔을 때 도로(道路)에 관한 차원으로서 따라갔다가 찾아낸 것입니다. 그 가장 북쪽의 첫번째 갈래는 수원(水源)이 조금 짧고 두 번째 갈래와 거리가 가장 가깝기 때문에 하류(下流)에서 두번째 갈래로 흘러 들어 두만강의 최초의 원류(源流)가 된 것이고, 청차가 가리키며 ‘강의 원류가 땅속으로 들어가 속으로 흐르다가 도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한 것은 첫번째 갈래의 북쪽 10여 리 밖 사봉(沙峰)밑에 있는 것입니다. 당초 청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두루 찾을 때 이 지역에 당도하자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 ‘이것이 곧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陸地)로 해서 길을 갔습니다. 두 번째 갈래에 당도하자, 첫번째 갈래가 흘러와 합쳐지는 것을 보고 ‘그 물이 과연 여기서 합쳐지니, 그것이 토문강의 근원임이 명백하고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경계(境界)를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이 여러 수원의 갈래로 경계를 정하게 된 곡절의 대략입니다.

신(臣)이 여러 차사원(差使員)들을 데리고 청차가 이른바 강의 수원이 도로 들어가는 곳이란 곳에 도착하자, 감역(監役)과 차원(差員) 모두가 하는 말이 ‘이 물이 비록 총관(摠管)이 정한 바 강의 수원이지만, 그때는 일이 급박하여 미처 그 하류(下流)를 두루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푯말을 세우게 되었으니 한 번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허(許)와 박(朴)【거산 찰방(居山察訪) 허양(許樑)과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다.】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청차(淸差)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하류(下流)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臣)이 여러 차원들과 함께 상의하기를, ‘이미 잘못 잡은 강의 수원을 비록 마음대로 우리가 변경할 수는 없지만, 하류가 어떠한지는 논할 것 없이 물의 흐름이 끊어진 곳 이상은 진실로 마땅히 푯말을 세우는 안이 되어야 하니, 먼저 비(碑)를 세운 곳에서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되, 나무가 없고 돌만 있으면 돌로 쌓아 돈대를 만들고 나무만 있고 돌이 없으면 나무를 베어 목책(木柵)을 세우기로 한다. 오늘날 조정의 명령이 당초부터 한 차례 거행으로 역사를 마치려는 뜻이 아니었으니, 빨리 마치려고 하지 말고 오직 견고하게 하기를 힘쓰되 이른바 물이 나오는 곳에까지 이르지 아니하여 우선 역사를 정지하고 돌아간다. 강의 수원을 변통하는 것에 있어서는 서서히 조가(朝家)의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내년 역사를 계속할 때 진퇴(進退)하는 바탕으로 삼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더니, 차원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뒤에 들으니, 허양(許樑) 등이 미봉(彌縫)하는 데만 급급하여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목책을 두 번째 갈래의 수원에다 대놓았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목책이 끝나는 곳은 바로 국경의 한계가 나누어지는 곳입니다. 두 나라의 경계를 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한 두 차원의 뜻만으로 조정에서 알지도 못하는 물에다 강역(疆域)을 제멋대로 정했으니, 이는 마땅히 징치(懲治)하여 강토에 관한 일을 중히 여김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고 강의 수원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또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보다 좋은 대로 잘 처리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이유(李濡)가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

목차(穆差)가 정한 수원(水源)은 이미 잘못된 것인데, 차원들이 감사(監司)에게 말하지도 않고 평사(評事)의 지휘도 듣지 아니한 채 멋대로 푯말을 세웠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습니다. 청컨대 잡아다 추문(推問)하고, 감사도 또한 추고(推考)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박권(朴權)이 아뢰기를,

“홍치중의 상소에 보건대, 수원(水源) 중에 최초의 한 갈래는 곧 목차가 정한 것인데, 이번에 세우는 푯말은 안쪽으로 거의 20리 가량 옮겨 세웠다고 했습니다. 만일 뒷날 그들이 와서 보고 멋대로 옮긴 까닭을 묻는다면 무슨 말로 답하겠습니까. 목차가 정한 물이 비록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해도 진장산(眞長山) 밖을 굽어 돌아 흘러내려 가는 것인 듯하고, 그 사이의 연무(延袤)16360) 가 비록 넓다 하지만 이미 목차가 정한 것이니 이대로 한계를 작정해도 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끝내 과연 북쪽으로 뻗어나가 두만강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목차에게 말을 전하되, ‘당초에 정한 것은 잘못 안 것 같다.’고 한다면, 그들이 마땅히 답변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유가 아뢰기를,

“그들이 이미 경계(境界)를 정하고 돌아간 뒤 이러한 잘못이 있음을 우리 쪽에서 발단(發端)하여 그들을 견책(譴責)받게 하는 것은 또한 불편한 데 관계됩니다. 우선 목차에게 연유를 묻고 답변을 얻어 본 다음에 요량하여 처리하는 것이 옳겠는데, 시급하게 다시 간심(看審)하지 않을 수 없으니, 도내(道內)의 수령(守令)들 중에서 일을 잘 아는 사람을 차원(差員)으로 택정(擇定)하여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본도(本道)로 하여금 다시 가서 자세히 살펴보고 계문(啓聞)하도록 하였다. 이유가 또 청하기를,

“접반사(接伴使) 또는 감사(監司)가 데리고 간 군관(軍官) 중에서 한 사람을 가리고, 선전관(宣傳官)과 무신(武臣) 중에서 또 한 사람을 가려 보내어 차원들과 함께 간심(看審)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 뒤 이유(李濡)가 또 연석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감사(監司)의 군관 조태상(趙台相)에게 명하여 무산 부사(茂山府使) 민제장(閔濟章)과 함께 그 고장 사람을 데리고 함께 가서 수원(水源)을 자세히 살펴보게 하소서.”

하고, 좌참찬(左參贊)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북병사(北兵使)가 전관(專管)하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마는, 만일 경관(京官)을 보내려고 한다면, 조태상으로는 사체가 중대해지지 않을 듯합니다.”

하고, 한성군(韓城君) 이기하(李基夏)는 아뢰기를,

“문관(文官) 재상(宰相)을 가려서 보내야 사체가 더욱 중요해집니다. 북병사 이택(李澤)은 늙어 험한 곳을 다니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문신(文臣) 중에 당상관(堂上官)을 가려서 보내라고 명하였다. 우참찬 김진규(金鎭圭)가 상소하여 조신(朝臣)을 차출하여 보냄은 불가하다고 논하였는데, 이르기를,

“물이 땅속으로 흐르고 있는 곳에 푯말을 세움은 목차(穆差)가 앞서 한 말이 있으니 비록 우리 편의 관원이 단독으로라도 할 수 있습니다마는, 수원의 갈래가 어느 땅으로 들어갔는지를 살펴보는 것에 있어서는 저들의 차원과 함께 하지 않고 현탁(懸度)16361) 한 말만 가지고 할 수 없습니다. 저들의 차원 없이 단지 조신(朝臣)만 보내어 도로(道路)가 저쪽에 속하는지 이쪽에 속하는지를 불구하고 오직 수원만 찾기에 힘쓴다면, 이것이 과연 봉강(封彊)을 신중하게 지키는 도리이겠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전하(殿下)께서 대신의 말에 따라, ‘목차(穆差)가 경계를 정하고 돌아간 뒤에 이러한 잘못이 있는데, 만일 곧장 그 나라에 주문(奏聞)한다면 그가 편하지 못할 것이니, 우선 통문(通問)하여 회답을 보고 처리하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신(臣)은, ‘국경에 관한 일은 이미 중요한 것이어서, 정한 경계에 과연 잘못이 있다면 사리상 마땅히 그 나라에 먼저 알려 다시 간심(看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그 나라에 알리지 않고 사사로이 그 신하에게 말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또 논하기를,

“허양(許樑)과 박도상(朴道常)이【곧 그때의 차원으로서 잡혀 와 추문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미 잡혀 와 있으니 마땅히 이 무리들을 아울러 사핵(査覈)하여 더 자세한 것을 알아내고, 혹은 저들의 나라에 자문(咨文)을 보내거나 혹은 주문하여, 피차가 함께 간심하기를 청해야 거의 두루 상세하고 정대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다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유가 또 임금에게 아뢰기를,

“김진규의 소가 대체에 있어서 진실로 옳습니다. 직질(職秩)이 높은 관원이 경솔하게 그들의 땅에 들어감은 과연 편리하지 않으니, 차원들을 잡아 오기를 기다렸다가 자세하게 물어본 다음에 의논해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 상소에 또 ‘목차에게 사사로이 물어서는 안되고 마땅히 자문을 보내거나 주문해야 한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여러 대신의 의견이 모두 편리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목차가 견책(譴責)받는 것은 아직 말할 것이 없고, 만일 저들이 다른 차원을 보내 다시 간심한다면 목차처럼 순편(順便)할지 보장하기 어려운데다가, 혹은 경계를 정하는 곳에 있어서 도리어 변개(變改)하여 감축(減縮)하는 우려가 있다면 득실(得失)에 큰 관계가 있을 것이니, 먼저 도신(道臣)과 수신(帥臣)으로 하여금 그 고장 사람 중에서 일을 잘 아는 사람을 가려 보내 편리한 대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고 계문(啓聞)한 뒤 상의(商議)하여 처리함이 합당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또 다시 그대로 따라, 문신(文臣) 당상관은 아직 차출해 보내지 말고, 먼저 도신으로 하여금 편리한 대로 사람을 보내 자세히 살펴보고 계문하게 하고, 또 차원을 잡아다 추문하기를 기다린 뒤에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에 차원 허양(許樑)과 박도상(朴道常) 등은 잡혀 왔으나 사령(赦令)으로 인해 용서받았는데, 비국(備局)에서 불러다 물어보니, 허양 등이 공술하기를,

“백두산 도형(圖形)을 가지고 말한다면 목차(穆差)가 지적한 소류(小流)가 첫번째 갈래가 되고, 도로 차사원(道路差使員) 박도상과 갑산(甲山) 사람들이 지적한 바 수원(水源)이 솟아나는 곳, 즉 지금 푯말을 세운 곳이 두번째 갈래가 되며, 송태선(宋太先)이 지적한 바 물이 솟아나는 곳이 세번째 갈래가 됩니다. 당초 목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왔을 때, 박도상과 갑산의 길을 인도하는 사람 등을 먼저 두만강의 물이 솟아나는 곳으로 보내어 기다리도록 했는데, 목차 또한 뒤쫓아와서 물이 솟아나는 곳에서 채 10여 리쯤 못미쳐 하나의 소류(小流)를 발견하자 말을 멈추고 지적하기를, ‘이 산의 형세를 보건대 이 물은 응당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겠다.’고 범범하게 말했고, 곧장 두번째 갈래 수원(水源)의 머리 밑 4, 5리쯤 되는 곳에 이르러서는 목차가 이에 ‘이 물은 원래의 갈래가 분명하니, 내가 그 발원하는 곳까지 가 볼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군관(軍官) 조태상(趙台相) 한 사람만 혼자 가서 발원한 곳을 살펴보았고, 목차 일행들은 흐름에 따라 내려가다가 4, 5리를 지나지 않아 또 소류(小流)가 북쪽으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것을 발견하자, ‘앞서 발견한 첫번째 갈래의 물이 흘러와 이리로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또 20리를 더 가 지숙(止宿)하는 곳으로 내려왔을 때 목차가 우리 나라의 여러 사람들을 초치(招致)하여 산도(山圖)를 내보이며, ‘첫번째 갈래의 물에다 목책(木柵)을 세우면 당신네 나라에서 말하고 있는 물이 솟아나는 곳에 견주어 10여 리나 더 멀어지게 되니, 당신네 나라에서 땅을 많이 얻게 되어 다행이다.’라고 하므로, 따라간 일행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의심없이 믿고, 중간의 8, 9리는 다시 간심(看審)하지 아니한채 그대로 흐름을 따라 내려와, 노은동산(盧隱東山)을 지나 어윤강(漁潤江)에 있는 사신(使臣)이 머무는 곳으로 와서 모였습니다.

8월 초순에 순찰사(巡察使)가 비국(備局)의 관문(關文)에 따라 다시 백두산에 푯말을 세우는 차원(差員)으로 차출했기 때문에 경성(鏡城)으로 달려가서 북평사(北評事)와 함께 역군들을 데리고 역사할 곳으로 갔는데, 데리고 간 장교(將校) 손우제(孫佑齊)와 박도상(朴道常) 및 무산(茂山) 사람 한치익(韓致益) 등과 함께 가서 30여 리를 가며 찾아보니, 수세(水勢)가 점점 커지며 북쪽을 향해 흘러갔고 두만강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30리를 오가는 동안 피인(彼人)들이 다닌 자취가 있었기 때문에, 손우제는 혹 피인들과 서로 만나게 될까 염려하여 나아가지 않으려고 하며 번번이 뒤쳐졌고, 한치익은 또한 ‘저는 변방 국경에서 생장한 사람이기에 피차(彼此)의 지형을 잘 알고 있는데, 이 물은 분명히 북쪽으로 흘러가고 두만강으로는 들어가지 아니합니다. 만일 혹시라도 두만강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한다면 뒷날에 제가 마땅히 터무니없이 속인 죄를 입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목차가 말한 바 소류(小流)가 흘러 와 합쳐지는 곳이란 데를 다시 간심(看審)해 보았더니, 곧 산골짝 사이의 몇 리 쯤에서 곁으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돌아가 평사(評事)에게 보고했더니, 물이 솟아나는 곳에 이르러서는 우선 역사를 정지하되 품하여 결정하기를 기다린 뒤 처리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했습니다. 당초 저들과 우리 나라 사람들의 흐름을 따라 내려올 때 바로 지금 푯말을 세우는 곳에서부터 아래의 대홍단(大紅丹)까지는 각각 2일 반의 길이었는데, 목차가 지적한 첫번째 갈래라는 곳과 바로 지금 푯말을 세우는 곳의 중간에서부터 미미한 언덕이 시작되어 그대로 진장산(眞長山)이 되었고, 구불구불 내려가 무산(茂山)에까지 이르렀는데, 그 사이에는 원래 다른 물이 내려와 합쳐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또 목차가 지적한 첫번째 갈래에서 바로 지금 푯말을 세우는 곳까지는 거리가 대략 10리 가량이었고, 평사(評事)가 말한 첫번째 갈래는 곧 목차가 지적한 소류(小流)가 내려와 합쳐지는 곳인데, 지금 푯말을 세우는 곳과 거리가 몇 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목차가 지적한 물이 이미 잘못 본 것이라면, 박도상(朴道常)과 갑산 사람들이 지적한 두번째 갈래는 원류(源流)임이 분명하여 조금도 의심스러운 잘못이 없는 것이니, 이곳에다 푯말을 세우는 것 외에는 다시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평사가 말한 첫번째 갈래는 원래 산골짝 사이의 몇 리 남짓에서 옆으로 나온 세류(細流)이었으니 결단코 이를 가지고 물이 솟아나는 곳이라고 지적할 수 없으며, 만일 기필코 목책(木柵)을 이 물로 놓으려고 한다면 원류(源流)임이 분명한 상류(上流)를 버려 두고, 8, 9리 쯤을 돌아 내려가 비로소 푯말을 세워야 하니, 또한 합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또 흐름이 끊어진 곳에서 물이 솟아나는 곳까지의 사이에 북쪽으로 향한 소류(小流)가 5, 6갈래나 되고, 물이 솟아나는 곳에서 아래로 남증산(南甑山)까지의 소류로서 두만강으로 들어가는 것이 4, 5갈래인데, 숲이 하늘에 닿아 지척(咫尺)을 분간할 수 없는 곳에 소류(小流)가 이처럼 혼잡하므로 무식하고 얕은 생각으로는, 만일 뒷날 차원(差員)이 잘못 알고서 북쪽으로 흐르는 물에다 목책을 세운다면 앞으로 염려가 없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영문(營門)을 오가는 동안에 반드시 1순(旬) 또는 1달을 허비하게 되므로 사세로 보아 외딴 국경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지친 백성들이 4, 5일의 길에 여러 차례 역사에 동원되어 폐해가 적지 않았습니다. 한결같이 형편에 따라 우선 푯말을 세우고 시급히 영문에 달려가 자세하게 실상을 진달하는 것이 무방할 듯하였기에, 여러 차원(差員)들과 함께 의논한 다음 비(碑)를 세운 곳에서 아래로 25리까지는 혹은 목책을 세우고 혹은 돌을 쌓았고, 그 아래의 물이 나오는 곳 5리와 건천(乾川) 20여 리는 산이 높고 골짝이 깊으며 내[川]의 흔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푯말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또 그 밑으로 물이 솟아나오는 곳까지의 40여 리는 모두 목책을 세우되, 그 중간의 5, 6리는 이미 나무나 돌도 없고 또한 토질이 강하기에 단지 흙으로 돈대만 쌓았습니다. 전후의 실상이 이러한 데 불과합니다.”

하였다. 비국(備局)에서 이로 계주(啓奏)하고, 또 그들이 올린 도본(圖本)을 올렸다.

이어 복주(覆奏)하기를,

“자신들을 해명한 말이라 그대로 믿기 어려우니, 본도(本道)로 하여금 손우제(孫佑齊) 등 각 사람과 조태상(趙台相)에게 사문(査問)하여 장문(狀聞)하도록 하되, 그들이 공술(供述)한 것을 가지고 피차(彼此)의 동이(同異)를 고찰해 보고 서서히 다시 간심(看審) 여부(與否)를 품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태백산사고본】【영인본】 40책 472면【분류】 *외교-야(野) / *군사-관방(關防)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註 16360]연무(延袤) : 길이 넓이. ☞ [註 16361]현탁(懸度) : 멀리서 헤아림. ☞






긴 내용을 대충 요약정리하자면

0. 백두산 근처 두만강 상류 물길은 원래 좀 골아픈듯.

1. 목극등이 정계비에 토문강이라고 쓴 것은 두만강의 상류라고 생각했기 때문.

2. 그런데 이것은 목극등이 지형을 제대로 살피지 않아 착각했기 때문이고, 실제 목극등이 본 토문강은 두만강과 별개의 강이다.

3. 이 "토문강"은 만주 안쪽으로 계속 올라가는 방향으로 흐르는 강이라서 실제로 조선-중국 국경으로 삼을 수 없다.

4. 이건 처음엔 아무도 몰랐다가, 실제로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푯말 등을 설치하는 공사를 하던 중에 알게 됨.

5. 국경을 토문강으로 잘못 정했는데 이거 어떡하지?



......여기서 우리는 이 대화를 하는 모든 사람들이 의문조차 품고 있지 않는 근본 전제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선과 중국 사이의 국경은 기본적으로 두만강이라고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죠. 정계비가 세워지고 있던 당시만 해도, 애초에 조선인들 스스로가 두만강 너머 북쪽은 조선의 땅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정황상 분명해 보입니다. 즉, 비록 비문에서는 "동위토문(東爲土門)"이라고 써놨지만 실은 당대 조선인들도 그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뭐, 당시 국왕에서부터 하급 관원들까지 전부 민족반역모화사대식민사관에 쩔어서 그랬다면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그러므로 소위 간도, 곧 두만강 너머 일부지역에 우리나라가 주권을 행사한 적은, 적어도 조선후기까지는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조선 말기 고종무렵에 조선-청 국경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조선인들의 간도 이주 및 조선 관원의 파견도 단순히 조선말기에 국한된 현상일 수밖에 없으며, 법적으로 그 지역에 우리나라가 주권을 행사한 것은 오로지 구한말 서구 및 일본 제국주의를 통해 청이 약화된 무렵부터 을사늑약 이후 간도협약이 체결된 시점까지의 고작 수십여년간 뿐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말하자면 1885년과 1887년에 있었던 "동위토문"의 국경선 논쟁에서 이중하의 주장도 결과적으로는 근거가 약한 것이 되는 셈이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과연 간도를 우리나라, 우리 민족의 생활공간이었다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매우 회의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발해 멸망 이후 근 1천여년간 이 지역이 우리나라에 포함되었던 적은 한 번도 없으며, 오로지 구한말 아주 잠깐 동안 영향력이 미쳤다는 것 때문에 우리 영토가 되어야 한다는 식이라면, 심지어 일본이 독도를 가져가야 한다는 따위의 주장도 또한 정당화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참고 : 조선왕조실록 sillok.history.go.kr



※ 정계비 건립당시의 이런 문제가 먼 훗날 고종대에 일어난 조청간 국경 논쟁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에 관해서는 슈타인호프님께서 아주 상세한 글을 써주셨기 때문에, 이 경과가 궁금하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 청과 조선의 감계회담, 도대체 어떤 이야기가 오갔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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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돈키호테 2009/05/05 19:58 # 답글

    저들의 논리대로라면 LA에는 한인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한국이 영사관을 설치해 관원들을 파견하고 있습니다. 즉 로스엔젤레스도 우리땅이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태원과 강남구의 절반을 미국에 양도해야 할까요? -_-;;
  • 글로거 2009/05/05 20:19 #

    이 논리가 교과서에 나오는 논리랍니다.
  • shaind 2009/05/07 18:51 #

    간도는 (아주아주 잠깐동안) 관원을 파견해서 우리 백성들을 다스리긴 했으니까요. (영사하고는 좀 차원이 다르죠) 여튼 부실한 근거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고 구한말 일시적인 사건에 불과했으니까...
  • Merkyzedek 2009/05/05 20:22 # 답글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shaind 2009/05/07 18:54 #

    천만에요...
  • 글로거 2009/05/05 20:25 # 답글

    잘 보았습니다.
  • shaind 2009/05/07 18:54 #

    고맙습니다.
  • 토르끼 2009/05/05 22:13 # 답글

    저보다 더 자세하게 정리해주셨군요. 결국은 사소한 오해가 후년에 일을 크게 만들었군요. ㅋㅎㅎ
  • shaind 2009/05/07 18:53 #

    지난번 하신 중력전선 낚시의 여파로 실록을 인용해놔도 조작 운운하는 소리를 들으시니 좀 안습이더군요.
  • 토르끼 2009/05/08 17:45 #

    뭐 어쩌겠습니까. 의심스러우면 인터넷 조선왕조실록이라도 뒤비던가 했어야죠. ㅉㅉ 지들이 안 찾고 조작 운운하면 병진인거임
  • 천지화랑 2009/05/05 22:18 # 답글

    어후 이 오해 ㅎㄷㄷ한데요;;;;
  • shaind 2009/05/07 18:55 #

    당장은 별 문제가 없이 대충 넘어갈 수 있었지만, 역시 그 당시의 컨텍스트와 콘센서스가 완전히 무너진 후대에는....
  • vermin 2009/05/06 00:16 # 답글

    정계비 위치로 모든 게임이 끗남.

    뭐 그런그런거라는 거지요 뭐 그런그런.
  • shaind 2009/05/07 18:55 #

    근데 정계비는 일제가 치워버려서... (그걸 왜 치웠는지 궁금하군요)
  • 海凡申九™ 2009/05/06 01:39 # 답글

    정계비가 끝내고 말았스빈다. ㅠㅠ

    인정하기 싫지만 현실이 그러한 듯... oTL
  • shaind 2009/05/07 18:59 #

    뭐 그래봤자 나중에 러시아에게 털리기밖에 더 했겠습니까, 가질 역량이 안 되는 영토란...
  • Achi 2009/05/06 01:47 # 답글

    차라리 대마도를 우리땅이라고 우기지...ㅡㅡ;

    이것두 정치적인 이슈가???
  • shaind 2009/05/07 19:01 #

    되었네요. 요 며칠 전에...
  • TomCat 2009/05/06 02:15 # 답글

    자료가 있어서 명쾌하군요. 잘 읽고 갑니다.
  • shaind 2009/05/07 19:00 #

    감사합니다. 사실 더 많은 자료를 보고 싶긴 한데 웹에서 용이하게 구할 수 있는 것은 조선왕조실록 정도군요. (사실 실록의 온라인화만 해도 놀랍게 좋아진 거지만)
  • 2009/05/06 03:34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shaind 2009/05/07 19:04 #

    거기서부터는 좀 실록에 아주 상세하게 나오는 것도 아닌 편이라... "한국의 영토"나 이중하의 개인 기록을 봐야 할 것 같은데 간편하게 쓰기에는 좀 어려울 것 같네요.(귀차니스트 -_-)
  • azusa 2009/05/06 07:02 # 답글

    간도문제를 무려 사학과생이라는 인간이 독도문제와 결부시켜서 반드시 찾아야하는 땅, 일제만행의 증거라며 발표한 적이 있는데 그때 듣다가 날아가서 발로 차버리고 싶었습니다 --;; (친한후배라 참고 좋은 말로 실신시켰지만 ;;)
  • JOSH 2009/05/06 09:42 #

    저런 ... 친한 후배면 마음껏 밟아버릴 얼마 안 될 기회였을텐데요....

    앞으로는 조카나 아들정도 밖에 기회가...
    아니.. 혹시 교편 잡으시면 제자도 가능...
  • shaind 2009/05/07 19:07 #

    잘 하셨습니다. 그때 날아가서 발로 차버리셨다간 후배분이 주화입마해서 환빠대마왕으로 각성해버렸을지도 모르니까요.
  • solarson 2009/05/06 08:14 # 삭제 답글

    간도는 우리조상의 혼이어린 땅이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 shaind 2009/05/07 18:58 #

    네 그러세요
  • 김라면 2009/05/06 10:59 # 삭제 답글

    모든건 목극등님의 '오해(!)'에서 비롯한거군요.

    목극등, 미워~
  • shaind 2009/05/07 19:08 #

    오해라기보다는 불성실, 착각에 가깝죠. 국경 정하는 걸 (당시 만주가 봉금되어있긴 했다지만) 그렇게 대충 한 건 좀 황당하더군요.
  • 새벽안개 2009/05/06 11:17 # 답글

    에휴.... 그런 오해가 있었군요. 덕분에 세세한 문제를 파악했습니다.
  • shaind 2009/05/07 19:11 #

    도움이 되셨다니 기쁩니다.
  • 캐안습 2009/05/06 12:10 # 답글

    토문강과 두만강의 관계가 이런 것이었군요.

    그런데 저들의 상당수는 이미 조선왕조를 화교왕조로 보기 때문에 쥔장님이 걱정하시는 사태는 이미 벌어져 있습지요.

    -뭐, 당시 국왕에서부터 하급 관원들까지 전부 민족반역모화사대식민사관에 쩔어서 그랬다면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ㅎㄷㄷ
  • shaind 2009/05/07 19:12 #

    한국 중/근세사 600년을 뭉텅 잘라먹을 그런 치들은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거든요.
  • asazi 2009/05/06 13:06 # 삭제 답글

    I am a Japanese blogger.
    I live in Fukuoka in Japan.
    Nice to meet you.

    Is the picture Mt.Paektu-san?
    Holy and beautiful mountain...
    I want to climb it someday.

    Recently, I write articles about Korea and Japan friend-ship.
    For example, Mr.No Mu-hyong, Dokdo(独島).
    I need Korean people's opinions.

    If someone who read this comment has curiosity about it,
    please come to my blog, and comment as the Korean people.
    Thank you.
  • shaind 2009/05/07 19:24 #

    Thankyou for visiting. It's quite surprising to see a Japanese in my blog.

    The picture above is the monument of borderline agreement between China(Qing) and Korea(Chosun) on near-summit of Mt. Paektu (白頭山定界碑), which was removed during Manchurian Incident(Mukden Incident) of 1931. The whole article is about it's installation.

    While having no "formal" opinion about Dokdo or former president, I will visit your blog sooner or later. Once again, Thankyou.
  • Skibbe 2009/05/06 16:21 # 답글

    찾아도 땅 붙어있는 북한이 먹으면 모를까...우리쪽이 먹기는 좀 그런;...
  • shaind 2009/05/07 19:09 #

    북한과 중공간 국경이 이미 조중간 조약으로 확정된 지금 상황에서는 북한이 먹을 가능성도 전무하죠.
  • 쿠우 2009/05/06 21:49 # 삭제 답글

    이거 알기 쉬워서 좋네요.
    우리나라 교과서도 동북공정하고 별반 다를게 없군요.

    그리고 위에 일본분 댓글이 있어서 그런데 독도에 관해서도 정리해주시면 안될까요?
  • shaind 2009/05/07 19:09 #

    독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 액시움 2009/05/06 23:13 # 답글

    간도를 정ㅋ벅ㅋ
  • shaind 2009/05/07 19:09 #

    대륙을 정ㅋ벅ㅋ
  • 융네 2009/05/07 06:45 # 삭제 답글

    환빠는 까야 제맛.
    그러고 보니 우리 국가대표선수중에서 중국에가서 간도는 우리땅 플랜카드 들고 있다가 전세계네티즌들에게 개관광당한 사건 있지않나요. 화성은 우리땅이라고 패러디됐던거..
  • shaind 2009/05/07 19:10 #

    아, "화성도 우리땅"의 원본이 간도였군요. 여튼 참 요상망측한 떡밥이 아닐 수 없네요...
  • asazi 2009/05/07 23:07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Thank you for your explanation.

    I didn't know that the monument of borderline agreement between China(Qing) and Korea(Chosun) on near-summit of Mt. Paektu (白頭山定界碑) was removed during Manchurian Incident.
    Did Japanese soldiers remove it?

    If that is true, I'm very sorry as Japanese.
  • 고마저씨a 2009/05/13 23:24 # 답글

    오... 외국분들도 들어와서 보는 얼음집이군요 :)
    멋집니다!! ^^*

    댓글타고 들어왔습니다!
  • 글쎄요 2009/08/12 21:23 # 삭제 답글

    맞는 말이기도 하긴 한데, 지금 흐름상 하긴야 뭐 조선인들이 워낙 그 전에 사대주의적 의식에 빠져지내다가 지금은 한국인들이 많이 계몽되서 민족주의적으로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결국 이것도 역사의 '현재성'때문에 일어나는 문제라고 봅니다. 한족의 영역은 기본적으로 양쯔강 아래 상하이 쪽입니다. 간도 영역은 몽골이나 과거 고려인들의 거주지였는데 당시 조선은 사대주의적 의식이 강해서 한반도 본토를 지배한다 해도 중국인들이 와서 설쳐도 아무말 못하고 있었죠. 간도의 문제는 과거로 직접 가서 조사하지 않는 이상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객관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점입니다.
  • 시규레 2009/08/12 22:22 # 답글

    흐음... 역시 문제가 심각한 곳중 한 곳이군요... 간도란...
  • maxi 2009/08/13 09:36 # 답글

    혹시 이거 비딴에 일부 전제 가능하나요..
  • shaind 2009/08/13 11:22 #

    소위 "Fair use"의 규칙을 따라 범위 안에서 전재하셔도 됩니다.
  • 김믿음 2009/08/15 01:04 # 답글

    음...........꽤나 충격적이군요. 이런 해프닝이 있다니.........중국입장에스는 그때 과실을 범한 청나라 관리를 부관참시해도 시원찮을 해프닝인거 같습니다. 근데................일단 두 나라가 조선과 중국의 경계를 두만강으로 생각하고 인지하고 있었다고 해도, 비석에는 "토문"이라고 적혀있고 구한말까지 그 비석이 계속 존재했다면, 결과적으로 토문강으로 정해졌다고 봐도 무방한거 아닌가요?
  • 김믿음 2009/08/15 01:09 # 답글

    비유를 들어 말하자면 현대에 흔히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A(청)와 B(조선)가 계약을 맺었는데, 실제 계약서에는 A(청)에게 불리한 내용이 있었지만 그걸 시정하지 않은채로 시간은 흘렀다(B는 속일 의도가 없었고). 나중에 B는 그 계약서에 자신에게 유리한 내용이 있음을 알고 최대한 이용하려했고(구한말 간도 이주) A는 계약할 때 그렇게 계약한 게 아니지 않느냐며 따지지만, B는 계약서에 이렇게 적혀있다며 배째는 상태...........물론 B의 행동이 얍삽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B가 완전한 억지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요?(계약서에는 적혀있으니)
  • 김믿음 2009/08/15 01:11 # 답글

    비유에서 돌아오자면, 청나라가 잘못됨을 알고 그 비문을 고치지 않는 이상, 조선이 자신의 영토를 토문강이라고 주장해도 청나라는 할말이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질문드립니다.
  • 글쎄,,, 2009/08/15 15:37 # 삭제 답글

    결국 토문강의 위치 논란인 것인데, 위 글은 정설이라기 보다는 토문강을 송화강이 아닌 두만강으로 봤을때의 주장이라 볼 수 있겠죠.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게 정설이라 믿을 수 있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들을 같이 정리해 주시는게 다른 분들의 올바른 역사 인식에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후에는 백두산 정계비를 중하게 어기냐 여기지 않느냐로 가게됐지만,,,)
  • 1234 2009/08/18 01:41 # 삭제 답글

    토론에 쓰기 위해 가져갑니다 'ㅅ'
  • 사과향기 2009/09/05 18:45 # 답글

    shaind님 반갑습니다. 간도영유권 관련해서 조선왕조실록 외에
    이익의 성호사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한치윤의 해동역사등이 있고,
    정약용은 다산시문집을 통해 두만강이 조,청간의 국경으로 두만강을 말하고 있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의 한국사DB에 가셔서 이런 내용들을 검색해보시면 찾으실 수 있을겁니다. 또한 서울대 규장각 홈페이지에는 조선시대의 다양한 지도들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예로 서북피아양계지도의 경우 조중간의 국경으로 분명 토문강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토문강을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재미난 결과가 나올겁니다. 즉 성호사설, 연려실기술상의 내용을 확인할 수 겁니다. 전 간도문제를 영유권문제로서만의 아니라. 이것을 다루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안의 국수주의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죠. 아 또 하나 좋은 자료가 있는데 '사료로서 증명하는 독도는 한국땅'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인이 제작한 지도에서 조선을 어떻게 그렸는가 입니다. 이것을 보시면 일본이 간도?는 누구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또한 재미난 자료죠.
  • 사과향기 2009/09/05 18:48 # 답글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상 백두산정계 당시일을 좀 더 상세하게 파악하기에 좋은 책이 있습니다. 바로 조선시대 선비들의 백두산 답사기? 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계신 분들이 11년전?에 펴낸 책으로 정계당시 참여했던 사람들의 일기내용이 있습니다. 또 그 뒤에 다른 사람 관련 내용도 있으며 마지막에 이중하의 것도 있으니 참고가 될 것입니다.
  • ㅉㅉㅉ 2013/12/18 18:31 # 삭제 답글

    이런 병신같은 환까 동북공정 화교놈 블로거 따위가 이따구로 해석해 놓으니 우리나라 강단사학 친일매국놈들이 활개치고 민족사와 상고사가 왜곡되지 니따위로 해석하면 중국쪽 사료는 아예 해석을 못한다 ㅄ같은 놈아. 욕밖에 안나온다. http://news.donga.com/3/all/20081231/8678294/1
  • 환빠는 2014/05/21 01:01 # 삭제 답글

    까야 제맛
  • 환빠는 2014/05/21 01:01 # 삭제 답글

    까야 제맛
  • 느티나무 2014/06/22 20:35 # 삭제 답글

    이 글과 엔하위키 간도 항목을 보면 우리나라가 간도가 우리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청나라 관리의 실수 때문이라는 거 같은데.. 제가 바로 이해한게 맞나요?
  • shaind 2014/06/23 00:40 #

    네 맞습니다.

    간도가 우리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중 하나인 백두산 정계비 비문이, 실은 조선측 대표의 참석불능 및 청나라 관리의 실수 등등 당시의 정황 때문에 잘못 만들어진 거라는 거죠.
  • 느티나무 2014/06/22 20:35 # 삭제 답글

    이 글과 엔하위키 간도 항목을 보면 우리나라가 간도가 우리땅이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청나라 관리의 실수 때문이라는 거 같은데.. 제가 바로 이해한게 맞나요?
  • 순수한 젠투펭귄 2016/07/06 18:32 # 답글


    Native American - Amazing Grace (in cherokee) 유투브에 치세요.
    : 체로키조선 애국가 1

    유우내애이이 라앙나앙 이이유우왜애지이 니이가아 구우여엉대애이이
    : 유내이랑낭 이유왜지 니가 구영대이
    ; 유내(오직 냇물)이 랑낭(힘차고 밝구나) 이유왜지(?)
    니가(사람이) 구영대이(언덕을 맞이하게 돼)

    ; 오직유(唯), 힘있을랑=힘찰랑(勆), 밝을낭(朗), 다스릴이=다스릴리(理), 말미암을유(由), 너:사람니(你), 언덕구(丘), 맞을:맞이할영(迎)

    나악워언조오서언 위이유우로오세애이 니이가아 구우여엉보옹나앙
    : 낙원조선 위유로세 니가 구영복낭
    ; 낙원조선 위유(위에 있음이)로세
    니가(사람이) 구영(언덕을 맞이하니) 봉낭(복되고 밝구나)
     
    ; 즐거울낙(樂), 동산(園), 아침조(朝), 고울선(鮮), 있을유(有), 너;사람니 (你), 언덕구(丘), 맞을;맞이할영(迎), 복복(福), 밝을낭(朗)

    가아세애이 로오이이 우우내애치이리이 이이유우로오래애 애이나아
    : 가세로이 우내치리 이유로래 애이나
    ; 가세로이(가쪽=바깥쪽으로) 우내치리(치우께서 안에서 다스리시니)
    이유로래(이런이유 때문이래) 애이나(애가 태어나)

    ; 어리석을치(蚩), 더욱우(尤)=치우(蚩尤)=치우천왕, 우내(尤內)=치우안,
    집우(宇), 안내(內), 우내(宇內)=온세상, 우내(尤內)=우내(宇內),
    다스릴치(治), 다스릴이=다스릴리(理), 말미암을유(由)
     
    자아비이내애려어 치이유우질리이 우우여어엉 내애이이우우 래애여엉
    : 자비내려 치유진리 우영 내이우 래영
    ; 자비내려 치유(다스림이 있으니) 진리(로다)
    우영(치우를 맞이해라) 내이우(내가 치우=내가 치우의 자손이로세)
    래영(오시니 맞아라)

    ; 사랑자(慈), 슬플비(悲), 다스릴치(治), 있을유(有), 참진(眞), 다스릴리= 다스릴이(理), 더욱우(尤)=치우(蚩尤)=치우천왕, 맞을:맞이할영(迎),
    올래(來)

    왜애이일로오 니이가아 라알리이 소오리이 자아유우 조옹허엉 이이유우우
    : 왜일로 니가 랄리소리 자유종헝 이유
    ; 왜일로(무슨일로) 니가(사람이) 랄리(랄라리=날라리=태평소)
    소리(를 듣니?) 자유(롭게) 종헝(종횡=돌아 다니는) 이유(로세)

    ; 너;사람니(你), 스스로자(自), 말미암을유(由), 세로종(縱), 가로횡(橫),
    종횡(縱橫)=거침없이 마구 오가거나 이리저리 다님,
    다스릴이=다스릴리(理), 말미암을유(由)

    니이가아 기이러언 뢰애지이소오리이 아아니이? 대애이일로오 니이가아
    : 니가 기런 뢰지소리 아니 대일로 니가
    니가(사람이) 기런(그런) 뢰지(벼락의) 소리 아니(?) 대(큰)일로
    니가(사람이 아니?)
     
    ; 너;사람니(你), 우레=천둥=벼락뢰(雷), ~의=어조사지(之), 큰대(大)

    우우나앙따앙지이 야아메애이이로오 조오저언자앙여엉 이이리이
    : 우낭땅지 야메이로 조전장영이리
    ; 우낭(치우 밝은) 땅지(땅의) 야메이로(들과 산으로)
    조전장영이리(조각품들이 길이 빛나리)

    ; 더욱우(尤)=치우(蚩尤)=치우천왕, 밝을낭(朗), ~의=어조사지(之), 들야 (野), 새길조(彫), 새길전(鐫), 조전(彫鐫)=조각품, 길장(長), 빛날영(煐)
     
    조오시어언나악워언 이이뤄어지이여어 조오히이 와안메애이이대애지이
    : 조시언낙원 이뤄지여 조히 완메이대지
    ; 조시언(좆이 얼운=남근숭배사상=제일로 좋은)낙원 이뤄지여(이루어져)
    조히(좋게) 완메이대지(모두=한 산이 돼지)

    ; 즐거울낙(樂), 동산원(園), 모두=하나=완전할완(完)
     
    유우메애이이 라앙나앙 이이유우왜애지이 니이가아 구우여엉대애이이
    : 유메이랑낭 이유왜지 니가 구영대이
    유메(오직 산)이 랑낭(힘차고 밝구나) 이유왜지(?)
    니가(사람이) 구영대이(언덕을 맞이하게 돼)

    ; 오직유(唯), 힘있을랑=힘찰랑(勆), 밝을낭(朗), 다스릴이=다스릴리(理), 말미암을유(由), 너;사람니(你), 언덕구(丘), 맞을:맞이할영(迎)
     
    나악워언조오서언 위이유우로오세애이 니이가아 구우여엉보옹나앙
    : 낙원조선 위유로세 니가 구영봉낭
    낙원조선 위유(위에 있음이)로세
    니가(사람이) 구영(언덕을 맞이하니) 봉낭(복되고 밝구나)

    ; 즐거울낙(樂), 동산원(園), 아침조(朝), 고울선(鮮), 있을유(有), 너;사람니 (你), 언덕구(丘), 맞을:맞이할영(迎), 복복(福), 밝을낭(朗)


    Native American - Amazing Grace (in cherokee)2 유투브에 치세요.
    : 체로키조선 애민가 2

    우우내애 라아나아 이이유우왜애지이 니이가아 구우여어해애이이
    : 우내 라나 이유왜지 니가 구여해이
    ; 우내(온세상=치우 안) 라나(살고 태어나니) 이유(가) 왜지(?)
    니가(사람이) 구여해이(거저 줘라)

    ; 어리석을치(蚩), 더욱우(尤)=치우(蚩尤)=치우천왕, 우내(尤內)=치우안,
    집우(宇), 안내(內), 우내(宇內)=온세상, 우내(尤內)=우내(宇內),
    다스릴이=다스릴리(理), 말미암을유(由), 너;사람니(你), 건지다: 돕다:구원할구(救), 줄여(與), 구여(救與)=거저주다

    나악워어조오여어 위이유우로오세애 니이가아 구우여어해애이이
    : 낙워 조여 위유로세 니가 구여해이
    ; 낙워(즐거이) 조여(줘라) 위유(위에 있음이)로세
    니가(사람이) 구여해이(거저 줘라)

    ; 즐거울낙(樂), 있을유(有), 너;사람니(你), 건지다:돕다:구원할구(救),
    줄여(與), 구여(救與)=거저주다



    저작권등록 되어있고요, 비상업목적으로 마음껏 쓰십시오.


    이선원입니다. 010-2494-5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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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말의 뿌리와 조선의 역사 1 ~ 34, 보십시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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